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바티깐」에서는 지난 6日字로 公議會에서 결의된 4個 律令의 施行規定을 발표했다.
「로마」를 위시해서 세계도처에서 公議會의 結實이 눈에 보이리만큼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世紀的인 조류에 合流해서 우리 한국 가톨릭도 最近 두드러지게 公議會이 「붐」이 일어나는 듯 하다. 서울 西江大學에서의 공의회 강의를 위시해서 大田敎區에서의 공의회에 依한 敎會觀 연구 및 본당사목 활동방안 연구, 수원교구에서의 본당운영위원회 연구, 大邱에서의 學士會 및 大學生들의 公議會硏究週刊行事 등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흐뭇한 느낌을 던져주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公用語委員會에서 번역한 새미사 전례통상문의 사용은 더한층 한국敎會 쇄신의 박차를 加하는 듯 싶다. 이밖에 京鄕 各地에서 눈부시게 열리고 있는 교리교사 강습회 其他 公議會 계몽강연회가 쉴새없이 本紙에 報道되고 있음을 보아 이 나라에도 公議會의 結實이 풍성할 것을 새삼스레 느끼는 바이다. 이러한 결과는 韓國의 司牧을 맡은 全國主敎團에서 여러차례 主敎會議를 열어 必要한 委員會 조직과 세심한 계획의 뒤박침이 있었고 많은 聖職者 修道者 平信者들이 표명한 관심리에서 이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敎會가 「小數人의 것」이 아니고 「大衆의 것」이라는 공의회의 정신을 상기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공의회의 정신이 전국 곳곳에 속속들이 파고들어가야 되겠다는 점이다. 全國 主要都市에서는 그래도 敎會現代化의 인식이 차츰 그 심도가 깊어져 가고 있지마는 시골 本堂이나 公所에는 아직도 前近代的인 精神이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물론 전국 도처에 있는 교리강좌에서 地方指導者들이 훈련을 받아 제 고장에서 그 實力을 발휘하겠지만 우리는 農村 그리스도敎 계몽에도 關心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따금 『都市는 살아가고 農村은 죽어간다』라는 평론가들의 말을 듣는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적인 悲運에 가톨릭은 동조할 수 없다.
都市에서의 公議會 계몽강연을 잇따라 農村敎友들의 계몽강연을 계획하고 실시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現今 韓國의 布敎현황을 볼진데 대다수가 都市集中的인 인상을 주고 있다. 勿論 한국 人口의 분포가 都市에로 集中되고 있고 그들의 知的 수준이나 경제적 수준이 信仰을 받아들이는데 좋은 條件에 있다 할지라도 農村의 실정과 대조할 때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都市本堂에서는 언제나 生氣가 도는듯 많은 사람들이 聖堂을 드나들고 있지마는 시골本堂에는 日曜日을 제외하고서는 물을 끼얹은듯 조용한 聖堂이 되고만다.
한국은 80「프로」가 農業이요 大多數의 人口가 農村에서 살고있지 않은가?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무엇인가 한국 가톨릭 布敎事業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天主의 백성」으로 불려지는 보편된 用語가 農民들에게도 例外일 수는 없다. 더 많은 「하느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그곳에 관심을 일으키자. 그리스도의 敎會는 一部 小數人의 專有物이 아니다. 따라서 農村布敎 實務者들도 입을 열고 외쳐야 한다. 公議會의 精神이 잘못 인식되는데 대해서 그 是非를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現今 이 나라에도 敎會現代化 作業이 활발히 젘개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과업은 태산처럼 쌓여있다. 하루 하루 變化되는 敎會는 언제가 온통 이 地上에 그리스도 王國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언제나 「로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참신한 그리스도敎會의 역군이 되어야 하겠다. 한국敎會 발전을 위해 주야불철 고심하는 諸位主敎님들의 뜻을 따라서 앞으로 더 한층 분발을 바라고 어딘가 잘못된 農村指導에 재고해줄 것을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