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교회는 말없는 긍지(矜持)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스스로 이방(異邦)에 가서 복음의 씨를 찾아와 이땅에 심었다는 사실(史實)이고 이 겨레의 구원을 서둘은 착한 시미정이 선의(善意)의 가성직(假聖職)교회를 만든 역사를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혹한 박해 속에서 수많은 성직자와 신자가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그 거름 위에 오늘의 교회가 자랐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명예로운 후손인 우리가 과연 그 증기를 내 것으로 삼기에 부끄러움이 없는가?
금년은 병인년 대교난이 있은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작년부터 이 거룩한 해를 기념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계획하였고 본 지상을 통해서도 여러차례 그 활동을 격려하여 왔다. 그러나 어느듯 이해가 기울어 앞으로 불과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각 교구에서는 관하 모든 신자들에게 순교적 신앙의 각성을 부르짖어왔고 순교자 기념성당 건립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있다. 첫째는 순교자 현양의 대상을 정하는데 있어서 그러하고 둘째는 그 기념행사의 종합적인 계획에 있어서 또한 그러하다.
순교자의 현양은 이미 천당에서 무한한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순교자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적 본분이요 특히 그 후손인 우리들의 신앙에서 오는 마땅한 발로(發露)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현양하는 목적은 바로 인류구원에 있고 특히 이 겨레 구령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그런데 우리들이 지금 행하고 있고 또는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대체로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집안 잔치에 편하고 바깥사람들을 이 잔치에 모셔오는데는 생각이 덜 미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신자들의 신심을 돋우고 기념성당을 짓는 일들이 결국 이땅의 구령을 위하는 것이 될 줄 모르는바 아니나 보다 직접적이고 또한 전국적인 대외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느낌이다. 순교자현양의 대상은 이미 천주의 백성이 된 신자보다도 오히려 순교자의 마지막 기구를 따라 외교인에게로 돌려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신자가 되지 못한 우리 겨레중에서 금년이 병인년 대교난 100주년이라는 역사적 사실만이라도 알고 있느 ㄴ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교구별로 하는 기념행사가 있고 각 본당에서 하는 행사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없어서는 안될 것이 전국적인 기념행사이다. 이미 각 교구 대표가 모이는 전국적인 기념행사준비위원회가 개최될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진척(進陟)이 매우 완만하고 그 박력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빨리 종합적인 계획이 서야 하고 그 활동이 게시되어야 한다. 「매스콤」이 동원되어야 하겠고 각 분야에서 「심포지움」이 있어야 하겠고 순회강연이 있어야 하겠고 기념성당이나 기념관이 서야하겠고 전국적인 기념 미사와 순례가 있어야 하겠다. 당시의 역사적 기념물의 수집운동과 전시회가 있어야 하겠고 사진전이 있어야 하겠고 전세계에 소개되는 한국교회의 순교사가 나와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여러가지 애로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시작하는 좋은 계기(契機)를 그대로 흘려 보내서는 아니된다.
지금 「빠리」의 외방전교회 박물관에 가면 그들이 활약한 각 전교지방의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교회박해를 증거하는 많은 유물둘이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우리교회에 관한 것이 가장 빈약한 것으로 되어 있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지금부터라도 그 유물의 수집에 나서야 한다. 후대를 위하여 우리의 손으로 그 사본(寫本)이나 상상도(想像圖)라도 만들어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적을 찾아 돌비석 하나라도 박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각 교구마다 순교기념관을 마련하여 이에 관한 유물과 책자와 모든 참고물을 모아 보존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로 우리의 할 일은 많다. 적어도 1년에 한번씩은 각 교구를 망라한 전국전시회를 가져야 하고 세계 유명한 박물관에도 진열품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의 후손들에게 좋은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 주어야 하지만 이땅에 천주의 나라가 이 루어지기 위하여는 역사의 유산도 소중히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시복(諡福) 시성(諡聖)이 문제되고 있는 이때에 이에 필요한 사료(史料)를 찾아 보내야 한다. 이미 성청에서는 우리 순교복자 중에서 성인품에 올릴 분을 가려 놓았고 묻혀있는 많은 순교자 중에서 복자품에 올릴 분을 조사하고 있다. 이때에 그 후손된 우리가 제 본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으로 천주님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이제 9월에 접어들었다. 9월은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성월이다. 우리의 정성과 소망을 한껏 이룰 수 있는 시섬에 이르렀다. 모든 성직자와 신자는 한몸이 되이 열심한 기구와 더불어 순교자 현양과 순교정신의 생활화, 순교자의 시복 · 시성을 위한 물심양면의 성실한 노력을 그리고 우리겨레를 이 「사랑의 잔치」에 초대하는데 온갖 힘을 기울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