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한국 순교복자들의 현양을 위한 복자 성월이요, 오늘 26일은 한국순교자 기념일이기도하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묻지않고 순교역사야 다 있는 사실이지만 유난히도 우리의 순교사는 색다른 광채가 있음을 우리는 스스로 자부하고 싶다.
우리 스스로가 복음의 씨앗을 손수입하여 그것을 자력으로 가꾸어 나간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가꾸어나가는데 여러 차례 혹심한 박해를 무릅쓰고 피로써 지켜온 우리의 신앙이었다.
일찌기 역사가 텔투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크리스챤의 씨앗이다』라고 뜻깊은 말을 한바있다. 한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듯이 순교자의 피가 땅에 뿌려져 씨앗이되어야 거기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영혼세계의 법칙이다.
오늘날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복음의 소리가 높고 성당마다 크리스챤들로 가득차며 예비교우들이 스스로 교리반을 메우고 있는 이 사실은 그 옛날 뿌려진 우리선조들의 피가 싹트고 잎이나고 열매가 맺어지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랴!
우리는 명예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예들이다. 그들의 선지피로 가꾸어진 오늘의 우리들이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후손된 그것으로써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물려준 신앙을 얼마나 굳건히 보존하고 있는가?
우리들 가슴속에 순교복자들의 정신이 얼마나 깃들이고 있는가? 복자들의 축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우리의 정신자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내년은 병인년 박해 제1백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건만 우리들 순교자들의 후손이 한 일은 무엇인가? 자랑스런 우리의 순교역사를 드러내 놓을만한 순교기념관하나도 마련하지 못한 우리들이다. 병인년박해 백주년 기념성당 건립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얼마나 큰 성의와 관심을 표시하고 있는가? 체면에 죽고 사는 우리들인지라 체면 손상이 우려되어 복자기념성당 청사진은 화려하게 걸어놓았지만 그 행동의 둔감성에는 순교자들의 후손이란 이름이 도리어 민망스럽기도 하다.
『순교자의 피는 크리스챤의 씨앗』이라고 했다면 우리도 또 하나의 순교자로서 자손만대에 복음의 씨앗을 불어넣어야 할 오늘의 우리들이 아닌가? 어느 시대에 있어서 보다 죄악이 성행하고 천주님의 법도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더한층 순교자의 정신으로 우리의 신앙을 보존하고 이 나라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여야 하겠거니와 우리는 도리어 순교자의 선지피의 역사를 더럽히는 냉담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인간으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천주님의 섭리는 오늘 우리에게 또 하나의 순교역사를 요구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바로 이 순간에도 공산치하에서는 순교의 피가 주님의 진리를 부르짖고 있다. 순교역사는 그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시대에도 실현되고 있다. 이북에 있는 바로 우리형제들이 이 시간에도 피로써 세속의 진리와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만 예외일수는 없다. 언제 우리 가슴에 박해의 칼날이 번쩍일지 모를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듯이 우리에게도 박해의 죽음을 통해 승리의 화관을 안배하실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할수록 우리 선조들의 순교정신이 아쉽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순교정신을 되살려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해야겠다.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우리의 순교정신을 빛낼 수 있는 병인년 박해 백주년 기념행사에 적극참여 해야겠다. 교구청의 지시가 있기 때문에 또는 본당신부의 지시가 있으니까 해야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순교정신을 발휘하여 마음과 성의를 바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