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본보를 통해 우리는 64·65년의 연간 각 교구교세통계를 본바 있다. 아직도 이 나라는 교세 팽창일로로 다름박질치고 있어 더한층 사도직의 긴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이번 통계에서도 우리는 일면 냉담자의 수가 격증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다시한번 우리의 포교사업에 허점이 없었는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냉담자 숫자의 통계를 보면
▲61년 19,900명 ▲62년 22,511명 ▲63년 28,517명 ▲64년 33,131명 ▲65년 37,245명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64년도에 비해 65년도가 더욱 증가되고 있어 66년도의 냉담자 숫자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불린자는 많으나 간선자는 적도다』하신 성경말씀대로 불린자들이 예외없이 모두 간선될 수는 없는 일이로되 불린자들의 잘못으로 또는 교직자들의 실수로 간선을 받지못했다면 그 책임은 더한층 무겁게 느껴진다.
1950년도를 기준하여 한국가톨릭 근대사에는 획기적으로 교세가 증가했고 그같은 경향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어 매년 수만명의 새로운 입교자들을 내고 있지만 그와 정비례해서 냉담자의 수가 늘어가고 있음을 볼때 우리는 어딘지 신입교우 신앙교육에 어떤 차질이 있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입교우 중 냉담자가 늘어가는 중대한 이유를 몇가지 제시한다면
첫째로 영세전 예비교우때 철두철미 신자되기에 필요한 교육의 부족이다. 일반적으로 교리공부만 하면 영세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아는 것과 신앙생활과는 다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면 천주교 일반신자로서 갖추어야할 요리문답의 교리지식 정도는 한 주일이면 「마스터」 할수 있다. 한 주일간 교리를 「마스터」했다고 해서 그에게 영세자격이 있을 수 있는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신앙은 생활이다. 「한국교회지도서」에도 엄연히 6개월간의 준비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거니와 생활로서의 신앙이 짧은 기간에 젖을 수는 없다.
어떤 지방에서는 -물론 좋은 전교열에서겠지만- 불과 2개월 혹은 3개월만의 준비로써 영세시키는 것을 볼수 있는데 우리는 이같은 단기준비가 냉담자 숫자의 증가라는 오늘의 현실의 중요이유가 아닐가 한다. 또 하나 사족을 붙이고 실은 것은 소위 「찰고」를 받을때 교리지식여부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그가 준비하는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가의 여부를 먼저 따져야 할 일이다. 예컨대 주일 미사에 꼬박 참례하는지 아침 저녁 기도를 바치고 있는지 대소재는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생활찰고」를 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영세예비자의 생활이 참되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변화돼가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비신자와 사제(아니면 적어도 사제를 대신할 수 있는 전교회장 혹은 교리교사)와의 상호 밀접한 접촉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일단 영세식을 통해 신입교우가 된 다음에도 그들에게 적어도 2·3년간 특별지도를 해야 한다. 우리 한국 가톨릭의 한가지 큰 폐단은 영세했으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점이다.
영세를 하면 교리 공부도 동시에 졸업이라는 그릇된 관념이 오늘의 냉담자 증가의 현실을 초래하고 있다. 간신히 교리공부해서 갓 영세한 교우는 금방 알에서 나온 병아리와도 같은데 그것을 다큰 것이라고 방관 해버린다면 그의 결과는 불문가지의 사실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영세한 자신들부터 또한 영세를 지도한 교직자들까지도 신입교우들의 새로운 지도를 언제나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
평신도사도직에 있는 분들로 예비자지도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대부·대모와 함께 신입교우들의 신앙생활지도에 더 일층 노력해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영세식은 졸업식이 아니라 시업식이다. 이제 출발하는 순간인데 끝장인양 착각한 우리의 과오를 불식해야 하겠다.
이밖에도 결혼문제·경제적 이유 교회내 혹은 기성교우들의 악한 표양, 자신들의 태만, 여러가지 냉담의 이유가 있겠거니와 냉담자를 내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상기한바 예비자교육 불충분과 신입교우들의 지도부족이라 할수 있으리라.
이제 그 해결방법을 제시한다면 첫째로 이미 말한바와 같이 철저한 신앙생활의 준비를 시켜야겠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현금 신입교우들의 재교육을 실시하는 문제이다. 어느 본당에든지 예비자교리강의는 있지만 주일강론을 제외한 신입교우들을 위한 교리강좌라든지 영성강화는 보기 드물다. 우리는 앞으로의 더 심각한 냉담자의 격증을 마음아파하기 전에 지금부터 신입교우들을 위한 교리강좌 영성강화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예비자지도보다 더 시급한 일로 생각된다. 산토끼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토끼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더욱 마음 아픈일이 아니겠는가? 영세자 숫자를 올린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하나이라도 참된 천주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더욱 중대한 일이다.
우리는 좀더 새로운 포교정신으로 과거의 과오를 뉘우칠줄 알고 우리가 걸어온 우리의 시비를 올바로 판단해서 앞으로의 우리역사가 과거의 되풀이가 되지 않도록 다짐해야 될줄 믿는다.
수적(數的) 증가가 천주의 나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성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욱 깊이 우리의 생활화돼갈때 비로소 교회는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