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물을 묘사할 때 거기 가장 적격이 말은 단하나 밖에 없단 말이 있다. 허나 어떤 실재적인 사물을 표시하는 명사, 가령 「하늘」하면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나간 경험에 의해 그 보편적 개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지만 그걸 다시 어떤 구체적인 특정한 하늘로 묘사하려면 사실 어렵다. 「아름다운 하늘」 하면 아름다운 것인줄은 알겠는데 어떻게 아름답단 말인가? ▲이처럼 언어란 것은 인간 인식 범위내에서 사상의 간접적인 전달매개체지 사물을 직관할 수 있는 수단은 못된다. 사실 인간에게 모든걸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사물의 진실을 추구하고 그 표현을 추구하는 문학이니, 대화까지도 팔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인간 기쁨의 큰 요소인 대화나 멋진 예술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 필요로 하는 표현수단일 것이다. ▲지이드의 「전원교향악」이란 소설에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여주인공이 은인인 목사에 대해 지극히 아름다운 장념을 그리다가 눈뜬 후에 그를 보고 환멸을 느낀다. 눈먼 자가 갑자기 눈을 떴을 때 세상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또 남에게 이야기를 듣던 것관 얼마나 엉뚱한 것일까? 백번들어 한번 본건만 못하단 말도 있듯, 우리는 이렇듯이 절묘한 눈을 가졌어도 사실 이 눈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미쳐 못깨달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허다하다. ▲시간의 제한, 원근의 제한, 산속에 있으면 사람의 발등에서 사람을 관람하는 개미격이 될 것이며, 공기 속의 세균은 볼 수 있는가? 이런 피상적인 사물은 과학이 경험으로 가능하다치고 바로 마주앉은 한길 사람의 내심은 누가 아나. 참으로 인간의 눈은 세상의 「아우트 라인」도 짐작 못함이 분명하다. ▲허나 이런 한정된 인간조건으로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추구해냈으며 우주의 신비가 무진장한 것처럼 인간의 인식의 추구력도 무진장하다. 그런데도 인간은 어차피 그 우주시비에 통달하기는 글렀는데도 끝내 그 추구를 멈추지 않는다면 인간의 위대성은 그 추구의 결과이기 보다 그 각고(刻苦)의 과정에 있지 않을까? ▲나의 인생은 내게 가장 적격이 아니기 때문에 끝없이 추구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안일을 도모하는자, 비단 지식만이 아니라 자기의 직책과 생활을 통해서도 일생을 추구함이 없이 적당 무사주의로 넘어가려는 자, 그 결말에 쉽게 절망하는 자, 다같이 인간의 진가를 상실한 겉껍데기 인생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