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의 70 「프로」가 農業에 종사하고 있는 農業國이다. 그런데도 모든 국가의 정책은 都市中心으로 기울고 農村에서는 거의 文化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政府의 어떤 政策을 批判하고저 하는 것은 아니다. 結論부터 말하자면 우리 敎會가 敎化事業을 하는데 있어서 農村問題를 너무나 등한시하고 있는 점을 시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農村敎職者의 失意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勿論 여기에는 가지가지의 의견이 뒤얽혀 있겠고 農村實務의 經驗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난문제들도 있으리라 믿는다. 農民들의 경제적인 곤궁이나 文化的인 후진性 등등 布敎事業에 지장을 주는 애로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여기에 集中的인 觀心을 모아서 그 方法論을 연구해야 한다. 都市와 비교해서 많은 「핸디캪」을 가지고 있는 農村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自然 속에 사는 그들은 소란한 도시민에 比해서 더욱 순진하고 인간본래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서는 더욱 더 福音의 眞理에 가까이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農村布敎事業을 무조건 경시하고 都市集中的인 태도는 잘못이다.
다만 布敎하는 그 方法的 問題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어떤 農村地域에서는 敎職者가 직접 농촌개발일선에 솔선하므로 對外關係가 부드러워지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福音선포에 크나큰 영향을 주고 있는 곳도 있다. 이러한 方法은 우리 한국의 농촌사정으로 보아 절실한 문제인 것 같다. 먼저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다음에 그들에게 삶의 참된 바탕을 박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技術과 경제적인 밑받침이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특수 지역사회 敎職者들에게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敎會當局에서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먼저 농촌포교사업연구소 같은 전문기구가 있어야 한다. 農業國에서 포교를 맡은 한국 가톨릭에 이런 농촌포교연구소가 없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든지 그 촛점이 흐려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의 例를 들어보면 政府에서는 때때로 농촌계몽대를 조직해서 젊은 남녀대학생들을 農村에 파견하여 농촌文化 증진에 기여하고 있지만 우리 가톨릭에서는 아직 한번도 公式的으로 농촌교회계몽반의 파견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농촌문제에 방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都市 집중의 學校 · 病院 기타 자선사업체를 구상하는데 비례해서 농촌전교사업에도 都市에 못지 않게 關心을 기울였다면 결코 오늘과 같은 農村의 現實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農村敎職者들에게만 모든 責任을 묻지 말고 우리는 다같이 農村布敎사업에 책임을 느끼고 새로운 참신한 方法論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육신이 헐벗고 먹지 못하는 그들에게 영온마저 굶주리고 시들어지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다시 말하노니 한국 가톨릭은 당면과제로서 農村포교연구소를 만들어 농촌전교의 획일적인 새 출발을 해주기 바란다. 여기에 덧붙여 사족을 하나 더 붙여둔다. 다름아니고 그 옛날부터 내려오는 소위 公所 판공성사는 으례 봄 · 가을 두 차례밖에 없다. 봄 · 가을 판공성사는 그옛날 교통수단이 불편했고 聖職者의 수가 부족했던 시대의 유물이다.
어찌 오늘처럼 교통기관이 좋아졌고 神父 수효도 많아졌는데도 그 옛날 유물로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敎理神學上으로 얘기해서 성총과 거리가 멀어지는 영혼은 그 생기를 잃게 되어 있다면 1年에 기껏 두 차례 聖事의 기회를 갖는 그들이라면 얼마나 영혼생명이 든든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農村本堂의 사정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方法을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 지역의 여건을 참작해서 농촌본당 사목자들은 좀더 버림받은 公所교우들의 성총생명에 적극적인 方法을 모색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와같은 公所司牧이 農村本堂神父 個人의 精誠이나 努力만으로는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 敎區廳當局의 적극적 支援없이는 不可能하다. 精神的인 뒷받침이 必要한 것이다. 전국의 公所 數는 1715個所이다. 적은 곳은 2·30명에서 많은 곳은 4·5백명이 넘고 한 본당 公所 數가 30個所나 되는 곳도 있으며 그 距離가 百里가 넘는 곳이 許多하다.
機動力을 갖춘 外國神父들의 公所巡廻는 韓國人神父에 比겨 쉽다. 이런 諸般문제를 반드시 洞察하고 時急히 適切한 方法이 摸索돼야 할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