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全世界가 敎宗聖下의 뜻을 받들어 傳敎의 主日로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每年 10月 第4主日은 그리스도敎의 本質인 傳敎를 默想하고 그 뜻을 硏究하며 應分의 募金을 하여 「로마」 聖廳으로 보내고 聖下께서는 이 金員을 全世界 傳敎地方에 充用케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周知의 事實이다. 오늘, 또 우리가 미사 中에 몇푼의 金錢만을 던져놓고 或은 다음날 아침에 約束된 恩赦를 노려 傳敎會에나 들어놓음으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또한번 이 뜻깊은 날 空轉 속에 보내며 그리스도敎徒로서의 根本義務를 全然 忘却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敎의 本質은 傳敎에 있다. 敎會를 세우신 예수님의 참뜻은 傳敎를 爲함이었다. 예수님의 降生과 受苦受難이 곧 傳敎에 있었던 것이다.
「바티깐」 公議會의 모든 決議가 傳敎에 그 目的이 있고 主敎도 神父도 敎友도 다 傳敎를 爲하여 있는 것이다. 傳敎를 생각지 않고 잠시라도 傳敎를 잊고 있는 主敎나 神父나 敎友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傳敎를 하지 않고 天堂 가기를 願하는 사람은 農事를 짓지 않고 秋收를 바라는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傳敎事情은 어떠하냐? 大敎區가 設定되고 大主敎가 任命되고 本堂神父의 職位가 上昇되어 形式上으로는 傳敎地方의 地位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마는 敎友들의 傳敎에 對한 姿勢며 特히 本欄에서도 指摘한 바 있는 今年度 敎勢의 統計가 가르쳐 주는 우리의 成續은 傳敎地方以下의 劣勢에 있는 것이다. 이 事實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 信者로서의 本分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結果를 提示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傳敎를 못한다고 恨歎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돈이 없어 傳敎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傳敎에 對한 우리의 姿勢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傳敎의 模範이신 그리스도의 33年에서 우리는 한번도 이런 歎息을 들은 바 없다. 예수께서는 30年의 默默한 人間生活에서 그리스도信者의 生活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가르치는」傳敎 3年에 對하여 그 10培인 「模範의 生活」을 30年이나 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主敎의 生活에서도 「그리스도」를 찾고 神父의 生活에서까지 그리스도의 生活을 求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우리 敎友들은 果然 그리스도의 模像을 보였더냐? 유다스의 亡靈을 보였더냐? 敎友들의 敎友답지 못한 生活, 사람답지 못한 生活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잃었느냐? 反省하는 날이 곧 오늘 傳敎主日이다.
둘째, 무릇 모든 活動에는 硏究와 計劃이 앞서기 마련이다. 即 詳細한 觀察과 正確한 判斷과 치밀한 行動計劃이 서야 하는 法이다. 「갈리레아」 바다의 고기를 낚는데도 예수님의 觀察과 判斷과 計劃이 있었다. 肉身을 기르는 糧食을 얻기 위하여 農學이 있고 農道原이 있고 農事指導所가 있지 않는가? 영혼을 救하는 傳敎活動에는 왜 아무것도 없는가? 特히 우리나라에서 傳敎를 위한 硏究機關이 없고 傳敎에 대한 觀察과 硏究判斷이 되어있지 않다. 우리의 傳敎方法은 몇가지 展示效果를 노리는 原始的이요 後進性을 免하기 어려운 狀態에 놓여 있다. 方法에 대한 指導 없이 過言일지 모르나 「덮어놓고」 傳敎만 하라는 舊態依然한 方法만을 驅使하고 있는 感이 不無하다. 눈에 보이는 建設에는 많은 努力을 傾注하고 있기는 하나 傳敎의 밑바탕이 되고 뒷받침이 될 時急한 繰絲機關 硏究機關의 設置가 時急히 要望되는 바이다.
祖國은 바야흐로 近代化를 爲하여 줄달음질치고 있지 않는가? 近代化의 樣相은 工業化에서 거기에 따른 都市化로 國民의 生活構造의 變貌를 必然的으로 强要하고 있다. 여기에 隨伴할 우리의 傳敎方法과 傳敎에 대한 우리의 姿勢도 必然的으로 變更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第2次 「바티깐」 公議會를 成功케 한 그 뒤에는 西歐의 「가톨릭社會科學硏究所」 「敎會社會學硏究所」 其他 「미쇼노로지」의 業績과 20世紀의 敎父들, 敎會碩學들의 革新의 業績들과 努力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우리의 記憶이 아직 生生한바 있다.우리 韓國敎會안의 人材들을 모아 傳敎에 대한 科學的硏究機關의 設置를 위하여 새로운 考慮가 오늘 이 傳敎主日을 期하여 있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懇切하다.
셋째, 傳敎에 臨하는 우리 敎友들의 精神的 姿勢에는 福音傳達者로서의 즐거움과 進就性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降誕 即 眞理來臨의 喜報를 自意로 傳播한 저 素朴하고도 純眞한 牧童들의 즐거움에 찬 傳播活動이 곧 우리의 傳敎姿勢가 아니겟는가? 强要되지 않고 自意로 積極的으로 兄弟들에게 傳하는 마음, 곧 즐거움 그것이었다.
傳敎는 즐거운 것이요, 앉아서 『목마르고 답답한 자』는 찾아오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요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가라! 世界萬邦으로』 하신 主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는 積極的으로, 밖으로 「나가야」한다. 앉아 기다리는 時代는 이미 지낫다. 牧童들처럼 뛰어나가 福音을 傳하여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여기에 또한 傳敎'의 世界性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主敎님들은 이제 서울敎區의 主敎 大邱敎區의 主敎가 아니요 世界의 主敎다. 傳敎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全世界의 그리스도化를 目標로 하나의 敎會를 爲하여 우리의 모든 努力과 生命을 傳敎에 2바칠 決意를 오늘 이 傳敎의 主日을 期하여 새롭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