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에 늦가을 찬비가 끝없이 내린다. 시골선 아직 추수도 다 끝나지 않았을텐데 근래에 없는 풍년이 제대로 여물지 걱정이다. 새싹이 돋을 무렵 거의 꿈길같은 봄비속을 우산없이 가는 이는 마음으로 멋이 있는 자다. 또 창밖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비도 낭만적이지만 가을 비는 아무래도 서글프기만하다. ▲깜깜한 가을밤 들창밖에 추적거리는 찬비소리는 시름있는 자의 애상을 돋구고 듣는자에 따라 암담한 느낌마저 든다. 일전 어떤 문예강좌에서 한 여류시인이 테니슨의 시를 인용하여 인간의 고독한 형상은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깜깜한 밤중에 홀로 우는 거와 같은거라고 했다. 이것이 인간의 숙ㅁ여적 고독이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절망만 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모른채 인간은 암야를 끝없이 헤매면서, 또 그가 두드리는 문이 그가 찾고 있는 문인지 아닌지조차 모르면서 열심히 문을 두드리는 구도자, 성실한 구도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저명한 가톨릭작가도 인생이란 고난에 싸인 암야의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은 어떤 해결이나 결과에 도달하기 보다는 그것을 추구하는 괴로운 과정의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또 인간의 가치일 것이다. ▲그리스도신자는 한 진리에의 확시을 갖고 문을 두드리는 자임엔 틀림없으나 그 구도의 길이 어떤 기성의 입장을 고수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닌, 그 역시 무진장한 신비의 세계속에서 고난과 모험에 찬 자신의 인생을 성실히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교리라기 보다도 차라리 생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말이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를 그 영원한 진리에의 문이 신자들 앞에는 아무런 미혹이나 모순이나 장해없이 호나히 열려있고 거기에 이를 평안한 마차가 우리 앞에 대기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똑같은 이난의 조건으로서 그들보다 더한 고난과 사랑과 희생을 치르고 생에 성실함으로써 거기에 도달한다. 이는 바로 「게세마니」의 절망의 임야를 겪은 신인 그리스도가 실천한 인생이며 그가 우리더러 가기를 권한 「좁은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