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 특급열차 안에서 차표검찰에 여념이 없던 여객전무가 어떤 수녀님 앞에 이르더니 그냥 지나친다. 두 수녀는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짓는다. 수녀들의 공신력이 우리사회 여러 곳서 높아진 것인가 보다. 『천주교 믿는 ○○이 한술 더 뜬다』는 욕설 듣기보단 훨씬 낫다. ▲「가톨릭」 시보에 간혹 대내적인 문제에 관한 비판적인 글을 실어 몇몇분으로 부터 못마땅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인신공격를 제외한 지상토론은 우리가 해야할 선급한 문제이니 더욱 활발하게 비판적, 건설적 의견들이 「메스·콤」에 의해 널리 전해지고 논의돼야한다는 주장도 들었다. ▲이 몇년사이에 「가톨릭시보」는 어쩌면 갑작스레 그리고 심할 정도로 대화·사회참여·현대적응·쇄신·일치 등의 용어를 주먹만한 활자로 매호마다, 각면에 걸쳐 써왔다. 물론 이것들이 「가톨릭시보」 주장만이 아니고 오히려 남의 말이나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의 경과였다. 아뭏든 공의회와 더불어 오랜 동면에서 깨여나서 교회는 전진을 다시 하려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가톨릭이 미소하거나 어색한 존재는 아니다. 누구나 검은 옷에 수건이나 고깔을쓴 이들을 쉽게 천주교의 수녀로 알아보고 신부를 대우하려 한다. 존경한다. 그러나 「노이로제」가 될만큼 「사회참여」란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리스도를 대중안에 옮길 수 있고 복음적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산더미 같은 밀가루의 덕분으로 돈 많은 교회라는 대명사가 고작인지도 모른다. 대내적 대화는 아직은 태부족이요. 거의가 모든 일에서 장님 코끼리 더듬기식의 과거였고 지금도 전근대적 생활안에 있다. 사회참여의 바탕은 말도 아니다.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는 「샤마니즘」적 반종교적 그리고 한국지성인의 서구인 못지않은 이기주의는 만만치가 않다. 연간 4·5만의 증가로 결코 자만할 수 있는 우리의 앞은 아니다. 질적향상이나 계획적 조직적 포교활동을 위해서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가 소아(小我)를 버리고 혼연일체가 되어도 오히려 역부족(力不足)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