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작은 자매회」 수녀 한분이 「로마」에서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6년전 학업도중에 수도를 지원하고 고국을 떠날 당시의 면모는 간 곳이 없고 본시 우아하리 만큼 섬세하고 곱던 자세가 푸른수의(囚衣)같은 수도복에 감싸여 있었다. 밖엔 커단 가죽 「산달」을 신도 허리를 동인 가죽혁대엔 무슨 인고처럼 소박한 묵주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옛날 화사하던 손길을 회상하듯 손을 잡으니 풀기없는 거친 손길에 굳고 누우런 못자국이 돋아 있었다. 윤곽이 곱던 그을린 얼굴엔 가난이 절어든채 그녀는 무구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수년전이 노동수녀회(수사도있음) 창시자 샤르르 후꼬 수사의 초상 사진을 대했을 때 이 세상에서 이런 얼굴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감동을 받은 기억이 세삼 되살아난다. 터부룩한 수염에 관골이 돋은 앙상하게 메마른 얼굴의 그 깊은 음영에 파묻힌 그저 선한 눈동자는 무슨 겸손이니 자애니 해탈이니 하는 인간이 도야할 수 있는 일체의 의식적인 덕을 느낄 수 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탈도 무아지경도 아닌 現실적인 살아있는 인간의 얼굴이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얼굴, 인간이 가상으로 그린 그리스도의 얼굴, 그런 예술이 구사할 수 없는 인간의 태초로부터 현재까지 발견해낸 인식으로 흐려진 얼굴이 아니라, 그것은 최초에 신 앞에 선 순수한 인간의 「영원한 얼굴」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거기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끝없는 친밀감이 깃들여 있고 의식된 겸손이 아니라 무구한 가난이 절어든 얼굴이다. ▲후꼬 신부는 원래가 불란서 부유한 귀족태생이다. 그는 천품이 종교심이 깊었던게 아니라 반대로아주 현세적 향락주의자며 호사가였다. 하다가 그는 어떤 종교적 계기로 일체의 세속 욕망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사막에 들어가 토착민과 함께 주리며 헐벗고 살다가 죽었다. 누구말처럼 인간은 행복만을 위해 난 것이 아니라 크고 적고 간에 어떤 사명을 지고 있고 이를 실천궁행하는데 그 가치가 있다. 흔히 신자들은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덕을 실천하는가 등으로 신자된 표양을 운위한다. 허나 구태여 그런 거창한 대의명분을 치켜들기 앞서 신자이기 이전에 인간기본적인 자기책임의무를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성실히 닦고 있는가 자문할 일이다. 실로 덕은 계율에도 의식에도 있지 않고 어떤 미소한 것에서나마 단지 그 순수한 마음과 실행에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