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예수 受難의 前奏曲이 들려온다. 聖灰禮 封齋首日, 우리는 언제나 다름없이 머리에 재를 얹는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새삼스레 장구한 說明을 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貴한 物件이라도 타버리면 재로 변한다. 가장 무가치한 것이 재다. 이렇게 人間은 무가치하다는 뜻이겠다.
여기서 겸손을 배우고 여기서 죄를 보속한다는 상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四旬節苦行을 시작하면 우리는 진정 재와같이 무가치한 것으로만 일관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러나 人間은 天主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재를 머리에 얹을 수 있었고 그 잿더미 속에서도 더 높은 가치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사가 마냥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듯이 재를 머리에 얹는 우리라고 해서 마냥 재와 같은 존재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苦行을 하되 뚜렷한 目的意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自虐을 위한 自虐이 아니며 금욕을 위한 금욕이 아니다. 거기에는 더 높은 가치가 있고 거 깊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언제나 부활의 승리가 동반하듯 우리의 四旬節 苦行에도 「새 人間」이란 高次的인 가치가 동반하고 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영향을 얻을 수 없다』라는 크리스챤의 人生觀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시기가 곧 봉재사순절이다.
그러므로 四旬節이라 하면 苦行과 희생을 뜻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참 크리스챤으로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얼마나 가까이 하고 살아왔는가? 平常時에 있었던 대소재도 없어졌고 봉재시가 접어드는 첫날부터 「舊正」이란 이름 밑에 또 全國的으로 대소재관면이 내려졌다. 慈母이신 敎會의 精神을 옳게 받아들여야겠다.
교종님이나 主敎님들의 대소재 관면 하달서 후미에는 언제나 『그러나 우리는 다른 方法으로 고신극기에 주력해야 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現代人들의 「安易主義」와 「快樂主義」가 그리스도를 격리시키고 있음을 아는 우리 크리스챤들은 더한층 그리스도의 「골고타」를 가까이 해야하겠거늘 도리어 頹敗的인 社會風潮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十字架祭典을 기약하는듯 슬프기만 하다.
鬪爭이 없이는 勝利가 있을 수 없고 희생이 없이는 賞給이 있을 수 없듯이 十字架의 가시밭길이 없이는 復活의 勝利도 있을 수 없다.
옛부터 그리스도를 中心으로 일어난 兩極의 두 思想을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하나는 「十字架 없는 그리스도」의 사상이다. 後者의 것은 바로 당시 유태인들의 思想이었다. 어느 民族보다 야훼를 가까이 하면서 救世主를 기다리던 그들이었건만 그들은 根本的으로 救世主를 錯覺하고 말았다. 이 땅 위에 黃金城을 쌓고 權利와 富貴로써 地上樂園을 건설할 구세주를 기다렸기 때문에 종래 그들은 人類의 救援者를 형틀에 못을 박았다.
이것은 지나가버린 歷史로만 남을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 時代에도 第2 유태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敎會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그들, 독실한 信仰歌라고 자칭하는 그들중에도 허구많은 사람들이 「十字架가 없는 그리스도」를 구상하고 있는듯 하다.
기계文明이 빚어낸 人間의 편리주의는 울리에게 또하나의 경고의 대상이 아닐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맞이하는 우리들로서는 「안락의자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찾아드는 似而非 종속들에 對해 挑戰할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다.
舊約의 聖祖들은 잿더미 속에서 참 人間의 모습을 찾았고 그리스도는 十字架의 수난을 通해 人類에게 새 生命을 마련해 주셨고 우리 先祖들은 迫害者의 칼 앞에 피를 토함으로써 永生을 얻었다면 어찌 우리인들 이런 大原則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올해도 四旬節은 시작되었다. 한해동안 범한 허구많은 죄를 진심으로 보속하자. 내가 하는 하나의 작은 희생이 우리의 가정을 정화하고 사회를 정화하고 나아가서는 全人類救援의 보탬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四旬節은 단순한 年中行事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더 한층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기이다. 무엇인가 자기 나름의 작은 희생을 결심하면서 보람된 사순절을 보내고 부끄럽지 않게 알렐루야 부활의 凱歌를 읊조릴 수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