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활절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 영혼의 목자들은 신자들에게 성주간(금년은 3월 20일부터 25일) 성수요일까지, 늦어도 성토요일 오전까지 - 동안 고해성사를 받도록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배려는 신자들이 성토요일 오후와 심지어 부활주일 아침까지 무더기로 고해소에 밀려오는 습관을 가졌을 때 특히 필요하다고 보는 바이다. 목자들은 이러한 폐단이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만 할 것인가? 여기 신자생활의 개선이 있어야겠다. 이미 10년전 1955년 禮部聖省이 발표한 성주간에 관한 새로운 훈령은 부활고해를 성토요일 오후와 부활주일 아침까지 미루지 말고 그전으로 볼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본당신부가 그날 하루종일 고해소에 捕虜(?)가 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충분히 여유있는 정신으로 부활 前夜祭儀式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또 부활 前夜祭 전례를 마치고 밤2시경에 잠자리에 들어가는 신부를 기쁜 부활날 아침부터 또 어떻게 고해소로 납치(?)할 수 있겠는가? 신부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사정을 불문에 부치자. 여기 우리가 발견해야 할 더 근본적인 현실문제가 있다. 그것은 부활성사의 본질의 문제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몇가지 실천적인 해결을 본란에서 보고자 한다.
부활 前夜祭는 성세 儀式과 미사성제가 본질적이다. 물론 성세허원 갱신식이 있지만 성세에 관한 典禮文이 지배적이라면 그 거룩한 밤에 영세하는 분이 少數이기 때문에 영세한 신자들을 위해서는 성세에 관한 「테마」가 구체적인 생활과 별로 관련성이 없는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사순절동안 再生과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秘事 앞에 영세때 받았고 또 죽을때까지 발전시켜야 할 새 생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요구에서 회개가 필요하다. 특히 교회의 눈에는 회개가 새로운 영세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로마 주교 전례서」에 『물은 씻는것, 눈물도 씻는것』이란 말이 있다. 성세의 물이 우리 죄를 씻지만 회개의 눈물도 우리죄를 씻는다는 뜻임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고해성사는 영세때 받은 흰옷을 되돌려주고 교회공동체와 화해시켜준다.
이러한 관점이 가장 절박한 현실문제로 성주간의 개정된 전례 훈령에 등장한 것이다. 옛날에는 사순절의 보속이 외적이오 사회적이었다. 초대교회에서 특정한 대죄인 이 재(灰)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전까지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까지 즉 공식부속의 폐끼 이후 오래동안 구라파의 많은 교회에서 죄인들의 盛式赦譸禮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우리 중에 많이 없으리라 본다.
오늘날 주교좌대성당에서 부활주일 주교대례미사 후 주교가 베푸는 교종강복이 그 마지막 흔적인 것이다. 요컨대 신자들은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음으로써 부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축일과 고해성사를 너무 분리해서는 아니된다. 성주간은 구원의 가장 위대한 비사를 거행하는 특별한 주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사순절을 엄숙히 지냈다면 성주간에 영성체 하도록 준비함이 좋을 것이다. 만일 성주간에 부활고해를 하는 때라면 적어도 성수요일까지 고해성사를 완료할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결코 본당신부의 짐을 덜어준다는 것 뿐만이 아니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새누룩으로 주님이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날을 거룩히 보내기 위함에서이다. 신자들이 聖木金土曜日에 영성체 하는 습관을 차차 길러주어야 한다. 그날들은 일년중 특별한 날들이다. 최고로 성화시켜야 할 날들이다. 회개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始動하는 사순절 문턱에서 또 특히 마음을 쇄신하여 주님의 「바스카」(復活秘事)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적당한 시기에 고해성사를 받기를 권하는 바이다. 또 성주간 전례계획은 동방교회에서 언제나 보존했던 고해성사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성주간이 가까운 어느날 예컨대 사순절 신심의 모임이 있을 때 혹 聖月火水曜日 저녁미사를 인근 신부 혹 친지신부들의 지원을 얻어 회개에 관한 성경예절을 통해 집단적인 양심성찰을 시킨 후 고해소를 많이 차려 성사를 주는 것이다. 여기 신부들간의 협조정신과 또 신자들의 심리적 작용 등의 효과를 무시못할 것이다. 여기 아직 경험하지 아니한 어떤 시안을 제의한 바이나 우리는 다만 여기서 영혼의 목자들이 어떠한 정신으로 가장 막연한 그러나 신자들의 모임을 가장 기쁘게 하는 「바스카」의 직무중 으뜸가는 면에 再考가 있어야 하는가를 지금부터 상기시키고자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