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도인들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다가 그들의 거처를 마련했다. 불교의 암자, 도교의 도관, 유교의 서원이 모두 주위의 자연과 어울리고 있다. 참선하는 암자는 더욱 그러하다. 앞창을 열면 앞산을 가운데로 좌우의 산들이 균제되고 눈을 감으면 시내물 흐르는 소리가 맑다. 우거진 초목의 빛같이 철을 따라 변한다. 같은 빛갈이라도 기후 따라 변한다. 그뿐이랴, 산중에는 각가지 나무와 넝쿨의 열매가 맛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감각과 의식이 절로 맑아진다. 따라서 속세의 부귀공명은 물론 본능의 쾌락마저 버리기에 아깝지 않아진다. 그 아름다운 자연의 미에 도취하다가 마침내는 그 미의 근원을 모색하게 된다. 모색하다가는 어느 삼매의 경지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 경지는 어디까지나 자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초자연의 언저리에서 빙 빙 돌뿐이다. 일종의 고상한 정신적 사치다. 주관적인 자기도취로 빗나가기가 일쑤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들은 그들의 거처를 황량하고 무미건조하고 하고 광막한 불모지인 사막의 컴컴한 동굴속에 마련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거기서는 귀를 즐겁게 하는 시내물소리도 침묵, 눈을 즐겁게 하는 초목의 변화도 침묵, 코를 즐겁게 하는 화초의 향기도 침묵, 혀를 즐겁게하는 미도침묵,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있다면 촉각을 괴롭히는 삭풍의 회오리가 때때로 일뿐이다. 동굴 속에는 난초의 화분이 있을리 없다. 벽에는 명필의 글씨도 그림도 없다. 있다면 고상이 있을 따름. 인간이 애착할 수 있는 자연미도 예술미도 없다. 그것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피조물들이요 인간의 작품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 집착하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완전한 침묵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초자연적 관상의 경지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외계의 침묵. 모든 감각의 침묵. 의식의 침묵. 마침내 내심의 침묵. 이제야 겨우 사막의 교부들의 심정이 상상된다. 그뿐아니라 동양의 도인 즉 자연신비가에게도 속죄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신비가들에게는 속죄의 고행이 반드시 따른다. 참으로 완전한 죄까지도 「무」하게 되는 그리스도교 관상가들의 무(無)는 침묵 안에서만 완성 될 것이다.
金益鎭(文筆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