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현대석학 오경웅 박사를 보고 어느날 그의 서양친구들이 이런 뜻의 농담을 한적이 있다한다. 『당신나라 풍속대로라면 당신은 결혼전에 부인과 한번 대면도 못한채 부모가 정해놓은 생판모르는 부인을 맹목적으로 맞아 평생해로 하니 얼마나 맹랑하고 놀라운 일이냐』고 했다. 그때 오박사 대답이 그게 무슨 놀라운 사실이냐 그러면 당신들은 나기전부터 당신부모를 당신마음에 드는 이로 골라서 태어났오. 형제도 당신이 원하는대로 선택해서 형제의 인연이 생겼오 했다고 한다. ▲이 번 새신부의 辯가운데 어떤 신부님이 사제와 신자사이를 역시 이와 비슷한 무조건이며 절대적인 관계로 표현했다. 즉 『사제직도 「나는 너를 낳았노라」는 그 분의 말씀으로 사제와 신자사이에 조건없는 계약관계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어찌 육친 부부 또 그러한 사제와 교우지간 뿐이랴. 실로 인간관계란 관계는 모두가 다 거의 우리의 任意를 벗어나 거의 무조건적으로 이루워지는 인연, 즉 운명적인 것이 아닐까. 왜 그 허구한 긴 세월 속에 또 하필 이세대 이 지점에 태어나 그 누구누구와만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옷깃하나 스치는 것도 억겁의 인연 탓이라는 말조차 어느 의미로 절실히 수긍이 간다. 인간은 이렇게 마치 흩어진 구슬을 무심코 실에 꿰듯 무조건적으로 맺어졌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이 무조건한 인연 끼리끼리는 얼마나 숫한 상대적인 조건으로 얼키고 저마다의 意識으로 대결하는지 모른다. ▲이즘은 부모자식 간에도 상대적인 조건을 내세우지 않는가. 자식은 부모더러 자식한테 무엇을 했느냐고 따지고 들고 부모는 부모대로 낳은 책임보다 자기 任意의 만족한 자식을 기대한다. 남녀의 결혼엔 얼마나 숫한 조건이 나오는가. 인물에다 족벌, 학벌, 돈 등등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행복한 조건은 아직도 무정한정이다. ▲결국 인간은 절대적으로 단한번 무조건 태어나지만 이 세상에 나서보니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도 없고 따라서 상대적인 조건을 벗어난 인간관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할때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로 인한 절대적 입장을 계승한 사제직 보다 순수한 직분이 없고 따라서 신자는 모름지기 이 사제직 자체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인 경외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