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성탄 서울 명동성당 子時 미사에 尹恭熙 주교님의 강론은 그 뒤 평판이 높다. 테레비를 본 미신자 친구에게서도 칭송의 전화를 받았다.
실인즉 나는 이 강론을 듣지 못했으나 그 소문만으로도 이다지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 주교님과 小時同學의 우정에서도 그러하려니와 그보다 나는 항상 우리 한국교회에도 훌륭한 설교가의 출현을 기대해 왔기 때문이다.
외람스런 얘기지만 주일마다 각지 성당에서 행해지는 우리 신부님들의 강론에 대한 일반신자들의 평판은 그 대부분이 별로 좋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더욱 노여움을 사겠지만 교우들이 주일미사참예를 하면서 강론을 즐겨 듣기보다는 그저 마지못해 듣는다는 표현이 더 솔직할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층은 미사에 지각하는 이유의 하나로서 강론이 흥미없어서라고 든다.
그들의 혹평을 그대로 옮기면 『신부님들 강론은 따분해서 못듣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에는 오늘의 젊은이들의 신앙심의 결여나 불성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 그들의 열띤 생명을 붙잡고 불꽃튀게 할 감동적인 설교가 드문것도 사실이다.
나는 20대 일본유학시절 청춘의 인생홍역 속에서 찾아다닌 것은 當代의 저렴한 종교가나 사상가들의 강연과 설교였다. 그때 石圓悟平이만 철학자에게서 들은 講話한토막 『일체를 고민한다는 것은 하나도 옳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한 일체의 고민은 하나의 고민도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는 고민의 誇大妄想症에 걸리지 말고 자기 고민의 씨를 먼저 발견하여야 한다』고 하던 그 말은 直指痛봉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人生의 指針이 되고 있다.
실상 이런 설교나 강론의 效能을 내가 굳이 강조하기 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이 依據하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집 아닌가! 그런 분의 제자요, 대리자로서 사명을 지닌 분들의 오늘의 설교의 소홀과 그 不精進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모든 신부가 능변가나 웅변가가 아님을 탓함이 아니요 또 博識과 碩學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오히려 소박하고 눌辯이래도 그 강론이 충분한 묵상과 준비를 통하여 행하여지고 듣는 이로 하여금 靈的인 感動을 불러일으킬 것을 바라는 것이다.
흔이 앵무새처럼 聖經말씀만을 羅列하거나 修식에 대한 잔소리만을 되풀이 하거나 또 자기 강론의 主題나 素材마저 저작되지 않은채 說敎臺에 나서는 타성의 강론은 止揚되었으면 한다. 필경 훌륭한 강론이란 신앙의 內的體驗이 隨伴된 강론을 의미하는 것이요, 곧 성직자의 修德修鍊생활과 비례하는 것이리라. 또 신부님들의 第一義的인 武器는 강론이요, 또 第一工課도 강론이라고 나는 믿는다.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