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大敎區의 젊은 司祭들로 組織된 聖요셉會는 今年度의 活動 指標를 農村敎會 돕기에 두고 去1月下旬부터 그 積極的인 運動을 展開하고 있다고 한다. 農村敎會와 그 兄弟들의 生活이 疎外되고 또 忘却된지 이미 오래다. 비록 晩時之歎이 없는 바 아니나 우리 敎會의 젊은 「애맅트」들이 司徒職 活動에 새로운 契機를 만들어 實踐에 옮겼다는 事實에 對하여 本欄은 滿腔의 慶意와 祝辭를 보내마지 않는 바이다.
解放後 特히 6·25事變後 우리들은 가톨릭 信者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그 特權을 자랑으로 여기고 10餘 성상을 살아왔다. 勿論 戰禍와 激甚한 기아속에서 不得已했던 우리들의 處地를 잊은 바 아니로되 이러한 外援의 愛德은 韓國敎友들의 習性을 어느듯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만네리즘」 속으로 몰아 넣고 말았고 또 그것이 固疾化되어 우리의 敎會를 우리가 發展시켜 나가는 모든 일에 韓國敎友들은 吾不관언으로 살아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힘으로 天主님께 봉헌한 敎會가 解放後 건립된 그많은 성당 중에 과연 얼마나 되나 살펴보라. 本堂神父님의 講論과 그 聖事執行에 마음을 돌리기 前에 「外援」과 「救濟物資」를 잘 얻어 나르는 성직자를 우리는 活動力이 있는 神父, 똑똑한 神父로 讚揚했던 우리의 부끄러운 過去를 反省하고 淸算할 때도 이미 지났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救하기 위하여 아낌없이 줄 줄을 아는 참된 敎友가 되어 自立할 줄 아는 우리의 敎會를 發展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성 요셉會 젊은 司祭들의 活動을 우리는 袖手傍觀할 수 없다.
都市敎會의 發展相에 우리는 決코 滿足할 수 없다. 천주의 나라가 그 뜻대로 이 地上에 이루어 지기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都市敎會와 農村敎會의 발전상의 格差는 더욱 격심하여 교우의 數나 성당 내 施設이나 農村傳敎에 必要不可缺한 모든 기재에 이르러서는 實로 寒心하다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隔離되고 소외된 惡條件下에 傳敎에 勞心焦思하는 「시골」 신부님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는 이들이 바로 동료 성직자들이며 이 어려운 事情을 알아야 할 本分은 곧 都市 요구들에게 있는 것이다.
農村성당 도웁기 運動에 積極 호응하는 길은 勿論 金錢의 喜捨일 것이다. 그러나 金品의 喜捨만이 반드시 이 運動을 도웁는 길이며 農民을 구하는 길인 것만은 아니다. 農村성당의 곤난은 곧 農村 교우들의 빈곤에 그 原因이 있을진대 다시 농촌빈곤의 要因을 분석할 때 그것을 다 枚擧할 수는 없으나 于先 농업기술의 後進要因에 對하여는 진보된 농업기술의 소유교우가 本堂을 中心으로 농업기술의 指導로 奉仕할 수도 있을 것이다. 獨逸의 聖분도會 修道院이 中世때 各地方 농업발전에 寄與한 功績을 우리는 다시한번 상기할 수 있지 않는가. 더우기 中世修道院이 地城社會開發에 寄與한 功勳은 實로 혁혁한 바 있었던 것이다. 도시교우들 가운데는 農業 其他 기술부문의 敎友도 學生들도 많을 것이다. 地方성당을 爲하여 技術奉仕隊 같은 組織도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農村빈곤의 經濟的 要因 제거를 爲하여는 경제발전의 物的原動力인 資本의 供給이다. 우리는 決코 政府나 其他 公共機關의 것처럼 巨大한 資本을 운위하지 않는다. 都市교우들의 零細한 金品일지라도 合하여 幾個의 「마이크로 프로젝트」를 농촌에 소개할 수도 있고 長期貸與할 수도 있을 것이며 特히 농민들은 經濟的이며 向上 意欲보다 生活安定 即 호구농업을 願하는 意欲이 强하며 또한 그것으로 滿足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농민들에게 경제농업에 각성을 촉구하는 啓몽運動 등도 농촌성당 도웁기 運動의 훌륭한 協助가 될 줄 생각하고 몇가지 例르 들어 두는 바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能力을 動員하여 젊은 司祭들의 이 運動을 도와 우리도 그 隊列에 나서기를 바라는 바이다.
農村성당을 도우는 일이 農村敎友들의 생활개선 或은 경제적 所得向上만에 置重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성당 건물의 新築, 교리반 혹은 主日學校를 위한 建物, 더우기 농촌본당 신부님들의 생활문제 등 일로 枚擧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금반 성요셉회의 농촌성당 돕기운동이 농촌성당에 약간의 金品을 送達함으로 그 目的을 達成했다고 만족해서는 아니될 뿐 아니라 근본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蛇足이나마 添言해 두는 바이다.
問題는 지역사회의 開發에 있는 것이다. 農村社會 即 鄕土의 건전한 開發은 決코 「經濟成長」만으로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오 그 鄕土의 調和된 發展, 다시말하면 經濟的=人道的 發展으로 이루워진 調和된 農村民들의 생활향상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人間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人間이 人間다운 生活을 하는데 있다』고 敎會는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소원은 農村敎會의 형제들이 하루속히 人間다운 待接 가운데 그 生活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人間다운 待接 속에 살 수 있는 鄕土는 兄弟적 社會的, 그리고 文化的으로 調和된 발전을 이룩한 鄕土일 것이며 이러한 鄕土에서만이 農村성당도 그 希求되는 發展을 할 수 있다고 우리는 確信하는 바이다.
예수님은 「바다 건너로」 가셔서 그들과 「한자리에 같이 앉으시고」 그들에게 밀떡과 물고기를 골고루 풍족히 먹이시고 그들에게 「講論」하시지 않아셨던가. 우리도 그들과 한자리에 앉은 精神으로 젊은 司祭들의 농촌성당돕기運動 隊列에 積極 참여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