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회의 발전은 먼저 그 사회의 균형(均衡)을 전제로 한다. 사회발전은 인간관계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며 정의와 균형과 질서와 조화는 결국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나라의 발전을 꾀하려면 먼저 국민생활에 균형이 잡혀야하고 국제사회가 발전하려면 먼저 국가간에 문화적 경제적 균형이 잡혀야한다.
교회는 살아 있는 인간과 그 사회를 교화하고 그 선행(善行)과 정의를 통하여 인간을 반성시킴으로써 그 영혼을 구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따라서 사회정의의 실현은 교회가 가진 가장 가까운 임무의 하나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미 여러 교황님들이 회칙과 교서를 발표하였고 여러가지 가톨릭액션단체들이 이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번 제2차 세계평신자 대회의 결의에도 면면히 들어나고 있다. 특히 사회발전에 관한 결의는 사회에서 뿐아니라 국제사회에 있어서 개발국(開發國)이 개발도상에 있거나 아직 개발되지 못한 국가에 대하여 원조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였고 그 구체적 방안으로서 국가 소득의 1%를 갹출하라고 호소하였다. 국민의 복리증진을 담당한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민간의 균형잡힌 발전을 위하여 강제력을 가진 법을 세워 여러 가지 사회정책을 쓰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자의 권익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몰지각(沒知覺)한 이기(利己)주의자들은 그와같은 사회정책을 공산주의사상이나 그 정책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가장효과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일러두고 싶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헌법이 노동자에게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단결권과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부여하였고 또한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노동조합법은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가입(加入)하며 단체협약을 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하였고 이를 방해 탄압하거나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불이익을 주는 사용자의 부당 노동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또한 노동쟁의 조정법은 노동자에게 동맹파업권과 태업(怠業)할 권리까지 주고 있다.
물론 교회는 노사간(勞使間)의 쟁의를 원하지 않는다. 그와같은 국가의 법률에 의하여 그 타당성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다.
사용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라는 것과 노동자의 존엄한 인간성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응분히 도우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정의의 실천과 사회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질서가 이루어지지 아니할때에 노동자는 단결하여 그들의 권익을 찾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뿐 아니라 사회의 균형과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노동운동을 일으키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원래 인류의 발전이라는 자기사명을 다하려는 것 외에 노동 자의 편도 아니고 사용자의편도 아니다.
따라서 만약 노동자가 부당한 요구를 함으로써 사용자의 인간적 존엄과 정의를 침범할 때에는 사용자의 정당한 권익옹호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들이 교회를 노동자의 편이라고 보는 것은 마치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자본주의자의 편이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판단이다. 교회는 공산주의를 단죄(斷罪)한다. 그 이유는 신(神)과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자본주의에 대하여도 많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利己的)경제인은 교회의 사회교의(社會敎義)에 위배되고 인류의 균형있는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강화도(江華島)에서 불행한일이 생겼다. 강화도 직물업자들이 노동조합의 결성을 반대하고 가톨릭노동청년(JOC)은 누구를 막론하고 앞으로 고용하지 말자는 결의문까지 냈다고한다. 그 뿐아니라 그곳 JOC지도 사제인 미국 메리놀회의 브랜스필드 신부를 협박하고 JOC지도가 반공법을 위반하는 공산주의 또는 친공산주의 활동이라는 말까지 나온 모양이다.
이런 망발(妄發)을 함부로 한 그곳 경찰서장의 몰지각한 언동이 가소롭거니와 그보다도 그곳 출신인 모 국회의원이 그 주동자로 알리어지고 있으니 더욱 아연할 일이다. 사회질서를 세워야 할 입법부의 의원과 사회질서의 파괴를 막고 그 범법자를 다스려야할 일선 경찰책임자가 헌법과 노동법이 보장한 권리를 유린하고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을 배격하는 선봉(先鋒)에 섰다는 것은 확실히 국가적으로 불행하고 걱정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행이 그들의 과오를 깨닫게 하고 교회와 JOC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좋은 계기(契機)가 되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