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강도짓을 한 사건이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는 월봉6천원에 6식구의 家長이란 절박한 현실을 견뎌온, 약진하는 한국의 말단공무원이다. 비록 가난이 죄라하고 그가 자신을 책임진 한 인간으로 받을 죄책은 의식이 불명치 않는 이상 조금도 감해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지만 사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선 어떤, 가속도의 힘에 실려 자신도 모르게 인간적인 범주 밖으로 몰려나가는 경우도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가 범죄의 피해자로서 그순간은 천주의 배려에서 조차 물러난 완전히 「버림받은 자」의 형상으로 이 수난주간에 등장한다. (4면 그림 참조). 눈을 치뜨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몰골은 털끝만한 여지도 없이 순수한 고통의 극치에 달해있다. 만일 천주께서 인간으로 강생하여 인간의 이런 부조리한 고통을 직접 겪지 않았던들 인간은 이 모순을 긑내 혼자 지고 신을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이 하늘에서 그의 任意로만 인간을 천국으로 끌어들인다면 인간은 그 「자유의 형벌」(?)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그냥 고통 속에 버티고만 있을지 모른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십자가엔 실로 인간이 지닌 모든 모순과 한계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먼저 천주께 십자가의 쓴잔을 면케 해달라고 간정했지만 또 이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항의했지만, 그들을 용서하라고 조건없는 사랑의 극치를 시현했다. 선택과 회피, 항의와 감수, 부당과 정당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뜻이며 그리스도는 이 인간 부조리를 스스로 질머져 보이고서, 이러니 인간들이여 어찌하겠느냐고 한 것이 아닌가? ▲聖書學을 전공하는 어떤 사제의 편지에 이런 말이 있었다. 『예수란 이름을 語原學的으로 풀이하면 「야훼는 餘裕를 마련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여유는 空間을 뜻하며 공간은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놀이터며 그것은 곳 자유를 의미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인생을 살고 그 極限에 몰려 세상에서 버림받은 예수가 「여유를 마련하는 이」라는 이 역설이 또한 십자가의 역설이 아닌가 ▲실로 사랑으로 인한 고통의 극치를 지나 해방(부활)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만물중에서 가장 괴로운 단 하나의 意識하는 동물이다. 인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現世에서도 고통은 내안에서 꽃으로 피어 난다. 어떤 시인도 말했다. 『아, 누구인가. 엃게도 슬프고 애달픈 마음을 맨처럼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