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시하고 악시하고 과소평가 당하는 것이 오늘날 부성애인 듯하다. 만일 사회문화가 모성애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로 평가한다면 이에 대한 문제는 별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사회는 서로간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부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구는 것이 상식화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신뢰를 하지 않는 것도 상식화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부성애를 비교하여 양호적 방도를 찾으려 한다. 미심장하게도 이 두가 기질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이란 열쇠의 관계에 매여 있다. 그러나 부성애란 말은 듣기에도 좀 어색한 듯하다. 왜냐하면 모성애에 대해서는 애상적이며 감상적이고 아기자기한 詩와 小說로 表現되어 있으나 부성애에 대해서는 뚝뚝하고 우울한 감을 주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로드·체스터필드는 『아버지 금 나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요. 아빠는 지금 다른 아버지들처럼 빈들빈들 술만 마셔요』라고 묘사하여 방탕한 男性으로 그렸고, 사무엘·존슨과 그의 여러 작가들도 역시 부성을 아들들이 대적하여 싸워야 할 폭군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관대하고도 원만한 사랑을 노출하기에는 거의 과묵(寡黙)해 왔다. 호머는 『부친을 알아보는 자식은 현명하다』라고 했고 쉐익스피어는 그를 와전하였다. 또 많은 작가들은 부도덕적 행위에 대한 무책임도 아버지에게 돌렸다. 이렇게 상식화 되어간 것이 부성애에 대한 일종의 망각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그러나 성경에서와 많은 성인들은 남자의 귀중한 이 부성애를 들려주고 찬양하였다. 우선 천주경에서 매일 외우고 보듯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내 성부외에 거룩한 이름이 없다』고 했고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성부는 성삼의 근원』이라 하였다.
여기 바로 천주님과 같은 부성애에 수수께끼가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천주님의 이 신비를(나는 너의 아버지)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곳에 부성애를 대리하고 남자의 사랑을 좋게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창세기 제2장에 여자를 만드실때 남자의 한 뼈를 택하신 王의 의향도 알아들을 수 있다. 부성애라는 커다란 범주안에 모성애는 하나의 보조·완성 역할로 즉, 그와 결합하여 꽃이 하나의 봄의 장식품으로서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꽃이 없는 봄을 누가 봄이라하며 봄볕없이 어떻게 아름다운 꽃이 피겠는가.
여자를 아담의 머리뼈를 택하지도 않고 꼭 중간의 뼈로 택하여 만든 것은 남자의 동무로 또 남자와 동등하게 도우라는 것이다. 또한 여자에게 주어야할 사랑을 잘 이해하기 위해 심장의 옆 자리를 찾아 택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 이러한 의미에서 희 랍의 철인 아리스토테레스가 『여자는 반쪽 인간』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다른 천주를 만들어 낸다고, 왜냐하면 하나의 아버지를 조각하고, 그를 반사하고, 닮은 조물을 만들고, 머리색깔까지도 같은 자들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크리스찬 아버지들은 천주님의 모상으로 천주적 부성애를 가진 고상한 부친인 것이다. 부설에는 아이들이 천주님을 아는데 첫 단계인 것이다.
천주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도 우리의 자부적 사랑이 잘 반영되었을때 우리의 하늘에 계신 부를 잘 알아들을 것이다. 부성애는 천주께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시 듯 무한한 사랑을 품고 있으나 모성애처럼 표현하는 점에서는 무딘 것이다. 아이들의 자유를 중하며 그를 사용하는데도 존중하며 길을 잃었을 때는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을 필요로 하여 도움을 요구하면 들어주리라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부성애는 그들의 장래에 대해서 원만한 계획을 한다. 우리는 수없이 모성애의 필요성을 듣고 또 들어왔다. 또 강조한다. 예수께서 성모님의 모성애를 본받지 않았던들 그렇게 세밀한 사람을 못알아 차렸을 것이고 성모님이 요셉성인의 고상하고도 관대한 사랑하에 있지 않았던들 구세주를 낳아 기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성애의 관대한 사랑안에 모성애의 세밀하고도 섬세한 사랑으로 아들의 교육을 시킬때 사회는 질서를 유지할 것이며 아들의 상호적인 사랑으로 평화는 이루어 질것이다. 부성애를 주관식 견지에서 고찰해 볼때 모성애는 그 객관화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말로 표현해서 모성애는 심오한 부성애의 구체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따라서 모성애의 이면에는 반드시 부성애가 미행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애 없이 부성애가 원만하게 표현 될 수 없는 반면 부성애 없이 모성애는 존재할 수 없다.
박동옥(천안천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