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古今에 다시없는 비유의 명인이시지만 복음 속에 나오는 약 40개의 비유 중 가장 逸品이라고 할 것은 저 루까 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와 그 아버지의 비유라 하겠다.
불교에도 法華經 七유의 하나인 窮子의 이야기가 이와 비슷하지만 장황하기만 하지 그 감동에 있어서 우리 이야기에는 비할바가 못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중에도 가장 白眉라고 할 대목은 돌아온 아들을 맞아서 그 부친이 잔치를 베풀즈음 그 맏아들이 나타나 반발하는 장면이다.
즉 『보소서! 내가 여러해 동안 부친을 섬길새 당신 명령을 조금도 어기지 아니하였으되 내 동무와 한가지로 잔치하기 위하여 염소 한마리도 종내 주지 아니하시더니 오직 당신의 그 아들은 창녀와 한가지로 제 재물을 허비하고 돌아왔으되 저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나이다』한다.
벌써 말 머리에 『보소서!』부터가 是非調임을 알 수 있고 동생을 『당신의 그 아들』이라고 비꼬는 것이랑 『갈보들과 함께 재물을 허비하고 돌아온 저』라고 욕설을 퍼붓는 것만을 보아도 그의 분노와毒舌에 짐작이 간다.
이야기의 줄거리로 보아 맏아들은 이제까지 얌전하고 근면하고 또 孝誠이 지극한 인물이었는데 이 아우의 귀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정반대의 성격적 일면을 노출시키고 만다. 즉 아우를 비난하고 저주함으로써 자기의 정당성과 공로를 내세우고 부친의 처사를 공격 타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살펴보면 동생은 이제까지의 모든 비행과 과거를 뉘우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진 대신 그 형은 반대로 오랜 세월의 얌전과 효성을 한꺼번에 차버리고 그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꼴이 된다.
형의 이러한 180도 표변한 태도는 어째서 일어났는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부친의 동생에게 향한 관대한 애정이 못마땅한 것이다. 좀더 정리해서 말하면 타성에 빠진 인간영혼 속에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깃든 교만이 이런때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즉 자기의 죄를 알고 참회하는 자는 겸손을 지니게 마련이지만 제스스로의 죄를 모르는 자는 교만을 범하게 된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포도밭 품군(마테오 20)』이나 『바리세이와 세리(루까 18장)』 비유로써 좀더 자세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내가 아는 바론 우리 神學에서는 저런 맏아들과 같은 마음과 행동을 죄라고 하고 동생처럼 회개하고 순수해진 마음을 『사함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다 紙面관계로 옮기지는 못하나 저렇듯 반발하는 맏아들을 달래고 타이르는 그다음 부친의 對話는 慈情이 넘쳐흘러 못내 흥그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복음은 그 후 맏아들이 아버지의 설유로써 마음을 돌렸는지 혹시는 더욱 빗나갔는지에 대해서는 言及이 없다. 좀 무례하고 세속적인 표현을 빈 다면 얄밉도록 이야기가 絕妙하고 文學的이라 하겠다. 아니, 그 말씀이 있으신지 2천년 후인 오늘날도 너무나 현실속에 더욱이나 내안에 生動하고 躍如하다.
여하간 저 비유속에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요리(要理)가 다 들어있다고 하여도 誇言이 아니리라. 어느 외교인이나 미신자가 그 臨終에 있어 나보고 그리스도교를 말하라면 서슴치 않고 이 이야기를 택할 것이다.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