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사내가 툭명스럽게도 『밝다』고한 정월대보름 달이 금년에는 유난히도 일찌기 「빌딩」 위에 휘영청 뜬것 같다. 그리고 크디크게. 인공위성이 범접한 달님의 「이미지」가 현대인에게서 「로맨틱」한 「노스탈지아」를 빼앗아 갔는데도 이날 밤만은 거기서 계수나무 그늘아래 떡방아를 찢는 토끼를 보는듯한 옛과 전설 속에 말려든다. 과히 나쁘지 않은 민족감정이다. ▲성미 급한, 아니 초조할지도 모를 아낙네가 뜰 한옆에 정안수상을 고이차려 놓고 촛불을 밝혀 비는 모습을 음력 14일 밤 산촌길을 지나치며 보았고 달맞이 불이 온산을 태운점경도 옛과 오늘을 잇(繼)게 했다. 고요하고 자욱한 산골, 우거진 어둠속의 불빛은 정말 등댓불이다. ▲이밤, 저달을 바라본 두에겐 나름대로의「빎」이 있었으리. 교회가 설득에 고민하는 현대인의 불안·공포·초조·번뇌에서 탈피를 희구하는 회포와 희망, 그중 어떤 것이 환상일지라도 한두가지의 빌고픔이 없었으랴. ▲빎은 희망이다. 약속의 실천을 낳는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특히 생명이다. 믿음이다. 비단 영생과 영혼만을 위해서뿐 아니라 바로 생활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다. 빎의 點綴이다. 그런데 그 빎이 간혹 잘못 이해되어 공리주의식으로 곡해된 사례를 최근에 와서 두드러지게 볼수 있다. ▲12월에 접어들며 시작해서 1월 하순에 끝나는 입시 합격이나 개인소망 성취의 「빎」 가운데서 많이 듣는다. 특히 미사를 청하고 예물을 드린 이야기 가운데는 「넌센스」로 들리지도 못할 사례가 있다. ○백원을 예물로 드리고 미사를 청했는데 불합격이니 예물를 반환해 달라는 것이 한 예이다. 예물이 아니라 기적을 강요하는 볼모다. 질서를 파괴하고 사랑을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을 미쳐 알지 못한 思考다. ▲예물은 사랑과 영광을 드리고 감사하는 것이며 기도 이다. 정성이지 갚음의 전제는 아니다. 순수한 「바침」이다. 뇌물과 부정이 통하는 한국적 기도일까? 그럴바에는 차라리 마냥 놀렸다가 입시때 미사예물로 합격증과 교환하는 것이 첩경이겠다. ▲바쳐진 예물은 지난 6년 혹은 3년을 무사히 교육시켜 다시 진학하게 됐으니 감사하며 더 배워보다 훌륭한 인간이 되어 봉사하길 소원하니 들어주시면 감사하는 것으로 그쳐야지 합격 않았으니 『신도 믿지 못하겠다』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면 큰일이다. 대부모나 회장들은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 같다. 비단 이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요행」이 통하지 않음을 명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