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말들 중에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종교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어느 국경보다 두텁고 뚫어질 수 없는 국경이 가로 놓인 것으로 아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아주 최근 이 양자간의 국경이 한번 뚫렸다. 그것은 바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교황 바오로 6세의 획기적이며 역사적인 회칙 「인류의 발전」에 대한 반향이다. 국경을 초월해서까지 동서 양 진영이 꼭같이 이 회칙을 위대한 것이라고 환영했다. 인류의 공동성(共同性)과 인간의 완성을 위한 지고한 가르침이라고. ▲지난 7 · 8년간 전세계 가톨릭신자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중심으로 전례없이 많은 교황의 회칙과 교령(敎令) 그리고 개혁을 보았고 실천 속에 살아오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사 속에 그의 사제군(群)으로써 생활하고 그리스도화(化) 하고 전 인류를 그의 애찬연(愛餐宴)에 초대하고자. ▲지난 5일부터 시작한 우리나라의 신문주간은 금년도 행사이 주제를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자」로 정했다. 우리나라 모든 천주의 백성들은 이 행사에서 「천주의 백성의 알 권리를 지키자」고 반성한다면 어떻게 현실을 분석 · 파악할 수 있을까? ▲권리는 의무를 수반한다. 그 허다한 회칙, 교령, 변혁을 얼마만큼 생활하게 실감했을까? 얼마만큼 「알려」고 했고, 「알도록」 가르치고 도왔을까? 신부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평신사도직이 아니라는 것이나, 이기주의와 인간만능, 자포자기와 허무, 무신론 사조의 도전 앞에 무관심과 안일이 사목의 자세가 아님은 상식이다. 협력 · 도움 · 형제애는 「알 권리」가 행사됐을 때 보다 효과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고 불필요한 오해나 추측 등을 배제한다. ▲비판을 두려워 하고 위신과 명예를 위해 공(公)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사(私)를 두둔하는 것은 분명 정의를 짓밟는 행위이다. 공동선을 위한 계획 · 노력 · 활동인 사목(司牧)에는 악의 수단이 개재도리 수 없고 그것은 「천주의 백성으로서의 알 권리」 자체이며 본질적 요건이다. 그러나 많은 비밀 속에 살아온 것이, 대화가 없었던 것이 우리가 아닐까? 얼마만큼 비밀이 있어야 할지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듯이. ▲그런데 5월 7일을 「세계 신문의 날」로까지 정한 교황 바오로 6세의 깊고 먼 계획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모든 천주의 백성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데 중요한 재출발의 기회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