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基南 大主敎께서 서울大敎區의 敎區長職을 辭任, 聖職 38年 感懷 깊은 明洞主敎座聖堂을 떠나 平素 마음의 故鄕으로 그리시던 「나자렡」 本鄕으로 隱退하셨다는 事實은 讀者들도 이미 主知의 일이거니와 敎區長의 辭任 隱退 등은 이번이 韓國敎會史上 決코 처음인 것도 아니며 새롭고 新奇한 消息도 아니다. 그러나 今般의 경우처럼 많은 雜音과 浪說과 速斷들이 꼬리를 물고 流布된 일도 없은 것으로 안다. 都下 各紙는 勿論 地方紙까지도 이 雜音 狼星들을 一齊히 記事化하고 있으니 過去에는 이런 類例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雜音」 또는 「浪說」이란 것들을 추려보면 「K 新聞 移讓」 사건 「軍票」 사건 「宗敎弗」사건 「不渡手票」사건 恩惠를 받은 「女人들의 作黨」 「金錢 갈취」 사건 등등이다. 어느 하나를 莫論하고 다 不幸한 일이요 부끄러운 일들이다. 그러나 「雜音」은 雜音이요 浪說은 浪說로 그치는 法이다. 여기서 그 眞相을 밝히거나 解明을 운위하고자 함은 決코 아니다. 時間의 흐름은 모든 것을 다 解決해 주리라는 것을 우리는 確信하고 있기 때문이다. 本欄은 이번 事例를 두고 來日의 敎會를 위하여 성직자나 교우들이나 다 같이 몇가지 反省해야 할 点을 指摘해 둘 뿐이다.
이렇나 이른바 「雜音」 또는 「浪說」들의 出處 내지 造作이 事實은 如何間에 가장 敎會를 사랑하고 아끼며 司牧의 길을 보필해야 할 성직자와 교우들 間에서 始作되었다는 点을 우리는 否認할 수 없다. 世俗의 報道機關들은 大體로 이 記事取扱에서 오히려 心性있는 態度와 理解와 同情的이었음에 比하여 敎會內에서는 一切 內容 報道에 默秘로 一貫했다. 우선 理解가 간다고 치더라도 口傳에서 口傳으로 그 傳播가 批判에서 一말의 兄弟愛도 찾아볼 수 없는 殘忍薄行의 心性이 아니었던가 征服의 사도직을 지금도 固執하고 있지나 않는가. 幾個 성직자의 過誤라 할지라도 決코 그 個人의 問題가 아니고 곧 敎會全體의 問題라는 것을 잊으서는 안된다. 우리는 特히 서울大敎區 各位 성직자들은 성직자 本然의 마음과 몸가짐으로 돌아가 司祭共同體的意識과 同氣間的 合心團結로 이 難關을 克服해줄 것을 希求하는 바이다.
이 「雜音『1의 大部分은 金錢, 特히 外換에 關한 件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機會에 聖職者들의 世俗的 事業關與에 對하여 再考할 必要가 있지않을가. 聖職者의 聖스러운 機能은 첫째도 두째도 聖事執行이요 靈的司牧이 아니겠는가. 敎育事業이나 病院 其他 醫療事業 救護事業 新聞事業 開發事業 등등에 相當數의 聖職者들이 비록 그것이 敎會의 事業이요 間接的으로는 傳敎事業이라 할지라도 直接的으로 事業主가 되어 그 運營에 骨沒하고 있을뿐 아니라 듣는 바에 依하면 聖事執行에보다 事業에 더욱 興味를 가진다고도 한다. 어떤 事業主는 事業體 運營에 必要한 資金獲得을 爲하여 全精力을 기울이며 全生活을 犧牲함은 社會通例로 되어 있다. 자나 깨나 「돈」만 생각하게 마련이다.
聖職者들의 貴한 神品聖事의 恩惠를 왜 「돈」을 위하여 浪費하여야 하느냐. 敎會의 事業은 平信者들로 하여금 맡아보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 敎皇 바오로 6世께서는 平信徒들에게 『諸君들의 知識과 才幹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福音을 傳할 수 잇는 새로운 길을 發見할 수 있도록 하자』고 講論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聖職者는 校長이나 社長이 될 能力이 없나는 말은 결코 아니다. 信者들은 미사도 告解聖事도 執行할 수 없다. 信者들이 敎會事業을 運營함에 있어 「돈」 걱정을 하면 「돈」을 만지는 것이 聖職者가 하는 것 보다 自然스럽지 않겠느냐? 世俗은 校長이나 社長이나 院長보다 聖職者를 더욱 높이 評價하고 더욱 높은 位置로 尊敬하고 있는 바이다. 지난 主日을 우리는 聖召主日로 지내고 「착한 牧者」의 不足을 걱정하고 聖召의 增進을 우리 다같이 祈求했다. 聖召의 增大運動은 聖職者의 祭壇歸還에서부터 始作하여야 할 것을 切實히 느꼈던 것이다.
서울大敎區는 多幸히 聖德과 學識을 兼備하고 改新될 來日의 敎會를 爲하여 그 指針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尹恭熙 主敎님을 本敎區長 任命時까지 敎區長 署理로 모시고 敎區 諸般事務의 再整備와 그 正常化作業의 巨步를 내디디게 된 것을 慶賀해 마지 않는 바이며 聖神의 豫言的祝福에 感謝하는 바이다. 韓國的인 風土는 人事交替에는 우선 한번 雜音이 따르게 마련인 것 같다. 각가지 雜音中에는 우리의 비위를 甚히 不快하게 하는 雜音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信任者의 出身地에 關한 雜音이다. 自己 本堂出身神父를 本堂神父로 모실 수 있는 境遇란 거의 없다. 他地方 出身이 普通이다. 主敎도 마찬가지다. 敎皇은 韓國人이 아니다. 그러나 不平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는 어느 家門이냐? 그런데 敎區長에 對해서만 왜 出身地 때문에 雜音이 있어야 하느냐. 第2次 바티깐 公議會의 「모디프」는 「司牧」과 「敎會一致」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離敎의 兄弟와 프로테스탄의 兄弟들과도 一致하며 人類全體의 家族的 一致와 兄弟的 相互扶助를 目標로 하고있는 이때이다. 모든 雜音을 一掃하고 예수님과 굳게 結合되어 그 精神 안에서 證據와 受肉의 使徒職을 勇敢하게 實踐하도록 하자.
끝으로 우리는 七旬節主日의 默想課題인 마태福音 20章의 「포도園」 勞務者의 處地에서 앞서 말한 雜音이나 뒤에서 말한 雜音 속에 혹 우리의 「妬視」가 눈에 보이지 않게 反影되지 않았는가. 깊은 反省이 있어야 하겠다. 雜音이 그칠줄 모르고 浪說이 끝없이 流布되는 곳에는 반드시 1「데나리오」에서 오는 「妬視」가 따르는 法이다. 그리스도를 十字架에 못박은 者는 決코 無識大衆이 아니오 無神論者들도 異敎人들도 아니었다. 每日 聖經을 朗讀하고 終身 聖전에서 奉仕하는 大祭官들이었다는 것을 銘心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