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꼬 처럼 그 생애와 행적이 東洋的인 성인은 없다.
그의 出家의 동기가 된 문둥환자와의 입맞춤이라든지 완전히 無一物, 無定處의 苦行이라든지 공중에 나는 새들에게 설교하고 제비들을 침묵시키고 태양이나 구름이나 물이나 불을 향하여 『나의 형제여, 나의 자매여』하고 부르는 등 자연과의 혼然融和는 마치 雲水行脚의 托발僧이나 汎神論的 禪師의 면목을 방불케 한다.
특히 그 위대한 單純과 天眞의 素朴은 우리 新羅의 惠空이나 大安과 같은 大德들의 逸括들과 너무나 흡사하며 그의 여러가지 超自然的인 異蹟마저도 그 자연스런폼이 우리高僧大德들과 相通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새삼스레 프란치스꼬 성인을 소개하자는 것도 아니요, 또 東洋의 聖者들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프란치스꼬의 행적이나 修道에서 佛敎的 文字를 빌면 大乘的인 修德行을 본받자는 것이다.
내가 年前에 일본에 가있을때 이제는 故人이된 분이지만 碩學의 간도 신부나 德源베네딕또 修道院신학교 교수로 계시던 哲學者 當眞嗣康 선생이 晩年에 禪道場에 出入하며 參禪을 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또 읽었다.
나는 그분들의 參禪이 知的關心에서였는지 또는 그 修德方法에서 어떤 内的證驗을 얻었었는지는 모른다. 오직 내가 홀로 짐작하기로는 그분들이 禪的修道方法을 가톨릭的으로 活用할수 있는가의 可能性 與否를 몸소 證驗하려 들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물론 우리 가톨릭에도 多樣한 觀想修道나 苦行修道나 神秘修德을 精進하는 修道會가와 禪있고 또 그 修道者들이 있다. 그러나 역시 그 修德方法이나 修道生活樣式등은 大體로 西洋的(?)이다. 어떤면에서 우리의 精神이나 生活에 異質的面 마저 없지 않다. 이런 意錘에서 나는 東洋에는 東洋에 알맞는, 우리 韓國에는 韓國에 알맞는 修道, 修德의 方法이 創案되고 채택되었으면 하는 念願을 갖는다. 이것은 우리 敎理나 敎會에 결코 背駞되는 바 아닐 것이요, 오히려 현재 「로마」가 지향하는바 信仰形式의 民俗化나 固有化에 좀더 內質的 意義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各宗教間의 對話역시도 共同善의 追求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修德方法의 果敢한 交流같은 것이 더 한층 意義를 가지리라고 본다.
내가 알기로는 禪에는 百尺간두에서 大悟覺醒하는 正法이 있다. 이것에 反하여 우리의 信仰生活은 小乘속에 安住하고 敎理나 守戒의 情性에 흐르고 있는 느낌을 갖는다. 避靜같은 觀想會가 이의 脫皮를 期한다지만 이것도 慣習化된 정도로 信仰의 深化나 그 完成에 決定的 契機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信仰樣式의 根元에는 自力本願과 他力本願의 差異가 있어 自力爲主의 禪的方法을 우리가 無條件 採擇할수는 없다. 그래서 일반 신자들이 이를 시험하기엔 큰 誤繆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修道會같은데서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内的證驗을 얻어서 一般化하여야 될 줄 믿는다. 한국에도 邦人수도회가 하나, 둘씩 창설되고 있으니 이런 면에 눈뜬 수도회가 출현되기를 바란다. 아니 한국에 나온 전체 수도회의 과제이기도 하리라.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