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한 모퉁이가 휘덩그렇게 비도록 꽃구경에 몰려간 일요일, 어느 유원지에선 거의 150명의 迷兒가 나 거의 3백명의 어른들이 風流에, 迷兒에 이래저래 넋을 잃게 된 모양. 이런 어수선한 4월 막바지에 들어 또 봄비가 자주 추적거리니 이제 꽃도 구경떼도 4월도 제물에 이은다. ▲월남장병들에게선 그런대로 진달래 피는 조국의 4월이 그립노라면서 花信을 전해줄 여성을 물색해 달라고 「월남 펜팔 중계자」에게 부지런히 편지가 온다. 때로 이들을 통해 좋은 인연이 생긴다는 반가운 소식도 듣는다. 그런데 이 역시 꽃구경처럼 노상 아름답지만 않아 일말의 우도움 기우가 스며든다. ▲某紙에 실린 어떤 여성의 경우, 한 파월장병과 부지런히 서신을 내왕하다가 그들의 사연은 자연스럽게 戀書로 진전되고 마침 그 장병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항까지 마중을 가려했더니 그 장병의 대답이 그럴 것 없이 자기가 시골 처녀를 찾아 오겠다는 마지막 편지가 온 후론 이 청년 장교로부턴 영영 소식이 두절된 것이다. 이래서 여인의 아름다운 환상은 어느듯 배신의 이즈러진 악몽으로 化했다는 사연이다. (이 경우 여성과 입장이 바뀔 수도 있겠고 사실 전쟁과 같은 절박한 환경일수록 사람의 감정은 보다 순수한게 아닐가 싶다) ▲또 어떤 실없는 작자는 익명(女性名)으로 「펜팔」을 맺고 어느순진한 병사의 戀書를 쳐들고 희롱하더란 이야기도 들었다. 싸움터에서의 흥분, 타국에서의 고절감이 그런 「로멘틱」한 감정으로 쉽게 몰아가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달래주지 못할 망정 처음부터 희롱하고 배역하는 심장은 도대체 어떤 생김새일까? ▲서신을 통해 인연을 맺고 만난을 무릎쓰고 영원한 영육의 반려가 되어 그들의 예술과 인생을 성축한 이야기론 저 영국의 저명한 夫婦詩人 로버트 브라우닝과 엘리사벳 브라우닝의 세기적 「로맨스」가 있다. 참으로 편지만으로 피차의 사랑과 신뢰를 맡기기엔 얼마만한 성실과 지성과 예지가 필요한지 모른다. 역시 「펜팔」은 「펜팔」로서 일단락 짓고 그다음 단계는 만나서 가부를 정함이 어떨지? ▲『오, 4월이 찾아온 내 고향 영국에 있고 지고』 부라우닝이 이태리 체류중 고국을 그리며 읊은 詩다. 월남에서도 젊은이들이 조국의 4월을 그리워 한다. 아니 인간이면 비단 월남, 이태리에서 뿐이랴? 지구 어느 구석에 있든 인간은 인간에 대해, 고향에 대해, 나아가 어떤 막연한 것에 대해서까지 「노스탈지」를 금할 길 없다. 이렇듯이 어쩌면 슬프고도 뼈저리게 아름다운 인간의 이 영원한 그리움을 희롱하거나 배역하는 자는 참으로 아름답도 성실한 인생을 얻을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