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8일 敎皇 바오로 6世께서는 同26일字로 된 今上敎皇으로서는 다섯번째인 「回勅」을 發表하셨다. 「人間의 發展」(POPULORUM PROGRESSIO)으로 序頭를 꾸민 이 回勅 亦是 敎皇 요안 23세의 「地上의 平和」처럼 「善意의 萬人類」에게 보내신 「아버지」의 간곡한 忠言이며 「잘 살기 위한」 나라를 만들어 보려고 착한 志向과 努力이 人間自體를 妄却하고 그릇된 길을 指向하고 있음을 指摘, 警告하며 「잘 살 수 있는」 나라의 올바른 길과 그 참된 모습을 啓示해 주신 것이다.
「잘 살 수 있는 나라」 建設의 靑寫眞이 바야흐로 三千里 山河를 뒤덮는 이 時点에서 우리는 이 回勅을 손에 들고 깊은 感動과 아울러 마치 이 忠告가 오늘의 韓國을 위하여 마련되어진 것이나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가지며 우리의 經濟成長의 자랑과 近代國家建設에의 方向을 省察할 好機임을 다시한번 切感하는 바이다. 同時에 現社會의 우리의 眞相을 率直히 檢討하여 70年代의 祖國에 있어질 面貌를 回勅이 指摘하는 바에 따라 豫見할 수 있을 것으로 아는 바이다.
回勅은 그 第1部에서 「잘 살 수 있는 世界는 決코 經濟成長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人間의 總體的이오 綜合的이오 調和된 發展에 있는 것」이라고 指摘하고 있다. 일테면 「積分的인 人間 發展」만이 그 人間과 同時에 人類를 福되고 滿足스럽게 하는 社會와 國家를 만들 것이라고 大原則을 提示하고 있다. 人間의 成長하는 동경은 「보다 더 人間이고」 싶어하는데 있는 것이다. 人間은 「보다」더 行動하고, 보담 더 알고, 보다 더 所有하고 보다 더 存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現實은 어떠하냐, 널리 世界에 눈을 돌려보라. 富益富, 貧益貧이 아니냐. 그 度數와 巨離만이 날로 成長하여 가고 있지 않느냐. 個人과 個人이 그러하고 社會와 社會, 나라와 나라가 그러하지 않으랴. 天主님의 靑寫眞은 그러하지 않았다. 人間 個個가 각각 發展하도록 召命되어 있는 것이다. 萬人의 아버지신 天主님의 計劃은 挽引이 다 보다 더 所有하고 보다 더 人間답게 存在함과 同時에 萬人의 아버지, 天主님의 아들들로서의 完成, 두가지였던 것이다. 天主님의 뜻은 決코 富益富, 貧益貧이 아니었다. 어떤 한 나라만이 잘 살거나, 어떤 한 地域만이 發展하고 어떤 個人만이 잘 살기를 願하시지 않으신다. 兄弟들이 골고루 充足된 삶을 營爲하고 마침내 自己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回勅은 貧困退治의 綜合的이고 時急한 方案을 提示하면서 貧困에의 鬪爭은 個體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指摘하고 人間의 奴隸化 即 集團에의 奴隸化의 危險을 警告하고 世界가 한결같이 物質文明만을 追求한 나머지 今日의 人間이 無意識 或은 自進物質主義의 誘惑에 빠져있음을 타이르고 있다. 今日의 우리 周邊을 살펴보라. 政治는 安定되고 經濟는 날로 成長하여 해마다 8% 以上의 世界最高의 成長率을 보이고 있어 都市에는 高層建物들이 앞을 다투어 聳立하며 自動車의 밀물은 洪水直前에 있어 外面上 世界水準을 指向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反面 家庭은 破壞되고 倫理는 그지없이 外面되며 信義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지 않으냐. 70年代에는 輸出이 10億 「달라」의 線을 넘을 것이며 國民所得은 世界水準, 적어도 中進國 住宅은 所謂 文化 住宅으로 數10萬 戶가 增築되어 農村에까지 家家戶戶 電燈은 물론 電話, 「라디오」까지 가지고 사는 「잘 사는 나라」가 된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처럼 急速한 建設과 成長하는 經濟를 볼 때 70年代의 우리나라의 富强을 疑心하지 않는다. 經濟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 事實이 常識일 것이다. 70年代는 우리가 貧窮을 免하는 希望의 해임을 確信한다. 그러나 오늘, 이 時点에서 우리는 70年代가 物質的으로는 充足되면서도 決코 幸福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亦是 確信하는 바이다. 그 때의 國民 個個人의 貧困意識은 또 무엇으로 막을 것이냐.
70年代에 우리는 더욱 物質主義의 奴隸가 될 것이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다 못해 마침내 天主를 죽이는 大事件이 없으리라고 누가 斷言할 것이냐. 회칙은 「더욱 더 잘 사」는 世界는 決코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했다. 武陵桃源은 人間에게 무엇을 주엇더냐? 「애고이즘」과 人間 墮落, 그 外에 또 무엇이 있었더냐? 「잘 사는 나라」는 兄弟愛가 있는 나라이다. 和睦과 平和가 있는 家庭을 우리는 福된 家庭이라고 한다. 社會도 그러하고 國家도 그러하고 世界도 그러하다. 회칙 第3部에는 先進國과 後進과의 關係를 力說하고 富裕한 나라가 貧寒한 나라에 援助할 것과 受惠의 態度마저 詳述하여 많은 紙面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할진데 우리의 社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兄弟愛가 없는 곳에 참된 繁榮은 있을 수 없다. 「執요한 貧慾은 天主의 審判을 받을 것이며 貧者의 노여움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다. 回勅은 貧困과의 鬪爭은 20世紀의 毒草인 「애고이즘」의 除去에서부터라고 하고 「富者가 가난한 나자로와 한 食卓에서 食事할 수」 없는 곳은 決코 「잘 사는 나라」가 도리 수 없다고 했다. 發展하는 나라는 人間開發에서, 그리고 人間發展에서 시작함을 명심하여 經濟開發 5個年計劃을 半滅하는 恨이 있더라도 人間이 調和되고 總體的인 向上을 위한 方案과 아울러 우리는 70年代를 向하여 進軍하자. 「잘 사는 나라는 眞理가 살아있는 나라, 사랑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