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회원 위리암·도일 신부의 手記를 엮은 「성인이 되는 비결」이라는 묵상책이 있다.
도일 신부는 1873년 아일랜드에서 나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신부로 활약하다가 전사한 분으로 그는 자기의 영적생활의 省察이나 결심이나 그 지향등을 메모나 일기로 적음으로써 이것을 또한 자기 精進의 한방법으로 삼았다.
그 수기는 아주 철저한 禁慾과 克己의 사상으로 충만하면서도 한편 즐거운 유머어와 일상적 친근성을 지니고 있어 우리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完德에 이르르는 길을 알기쉽고 자세하게 가르친다. 여기다 몇대목을 옮겨서 음미해 보자.
『克己를 행할 기회를 만났을때 우리는 흔이 「이것은 나의 힘에 너무 겨웁다.
나는 성인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왜 그대는 성인이 못되는가? 성인이 되는 것은 그대의 의무다!」
실상 우리는 성인이라면 별개 세계의 존재처럼 받들어 올려놓고 자기는 그 세계에 들어갈 마음부터 못먹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겸손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약함을 합리화하는 것이요, 또한 노력의 포기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성인이 되는 것은 超人間的인 헌신행위로 通念하고 있지만 실은 인간의 즉 무 즉 人生의 完遂인 것이다. 救靈이 본질적으로 성인의 列品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성인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도일 신부는 그의 手記의 여러곳에서
『자기에게 거스려서 행한다.(AGERE CONTRA!)』라고 짧게 적어 놓고 있다.
자기의 본성적 욕망이나 그 유혹을 물리쳐 끊어 버리고 이와 반대인 克己와 苦行을 택하여 천주께 나아가는 것은 그의 표현대로
『이것이야말로 完德에 나아가는 비결로서 성인들을 천주의 깊은 사람에 취하게 하고 또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크낙한 영광 속으로 이끌어 간 숨은 샘』인것 이다.
그런데 이 자기를 정복하는 생활이란 위대한 苦行이나 善行을 뜻함이 아니다. 그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細心하게 통찰한다.
『큰 苦行에는 얼마쯤의 外的榮譽가 따른다. 그러나 천주와 자기만이 아는 작은 희생의 기회는 쉴새없이 있는 까닭에 더 어렵다. 큰 시련에는 거기에 多少의 만족이 있지만 그것은 一時的인것이요, 또한 사람들의 注目을 끈다. 그러나 작은 克己의 기회는 언제나 남몰래 우리에게 달라붙고 있다』고 지적하고 『천주에게 향한 봉사는 그 어떤 些少한 것이래도 너무 작다고 할 것은 없다. 즉 가장 些少한 克己도 천주의 눈에는 위대한 가치가 있으니 가령 사랑의 눈길로 우러러 본 그 간단한 動作만으로도 천주의 많은 은혜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의 1909년 2월 2일 기록한 결심의 개조사항을 보면
★어린애들에게는 부드럽고 솔직하고 또한 참을성을 가지고 대할 것.
★결코 남에게 나의 괴로움이나 근심걱정이나 일의 분량 등을 말하지 않을 것.
★불친절 분노 또는 야박한 말을 입에서 내지 말것.
★남에게 대하여 또는 모든 일에 대하여 불평을 말하지 않을 것.
★언제나 시간을 정확히 지킬 것.
★작은 고통에 대해서 위안을 찾지말 것 등등이다.
마치 명랑한 시민생활 운동의 指針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도일 신부는 우리의 求道的 熱情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이 一針을 놓는다.
『열심이 없는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맥주의 거품처럼 부풀었다 꺼지는 열심이 아니라 의무를 다함에 있어 발휘해야 하는 理性에다 기반을 둔 열심이 있어야 한다』라고.
이렇게 살펴 볼때 성인이 되는 것은 어렵고도 쉽고 쉽고도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도일 신부의 말씀대로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이상 아무리 힘들더라도 우리 모두다 성인이 안 될 수도 없지 않은가.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