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사제를 물론하고 그들은 다 사람들 중에서 간택되며 또한 천주 대전에 저들의 사정에 있어 사람들을 위하여 저들의 대표자로 선정 되나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의 죄악을 위하여 예물과 희생을 봉헌하기 위함이니라. 자기도 또한 약점이 있는 자이매 몽매한자들과 또한 방황하는 자들을 친히 동정할 수 있어야 하리로다.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하는 것과 같이 자기를 위하여서도 죄를 위하여 제헌하여야 하리로다.
또한 아무도 이 고상한 지위를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 취할 바가 아니요, 오직 아이론과 같이 천주께 성소를 받아야 할지니라』(해브레아서 5·1~4)
『그리스도 당신 지상 생애의 날에 죽음에서 당신을 구원 하실 수 있는 그이에게 큰소리와 눈물로써 기구와 탄원을 드리셨으므로(천주 성부께 대한) 敬畏를 인하여 들어 허락하심을 받으셨나니라. 저 또한 비록 천주의 아들이시나 당신 수단으로써 순명을 배우셨나니라』(헤브레아서 5·7~8)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명백히 참된 사제상을 가르쳐 주셨다. 사제는 신품성사를 받음으로써 마치 오로지 참사제이신 그리스도(헤 5·6) 처럼 백성의 대표이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통해 하느님과 백성의 중간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사제의 본질적 요소는 그리스도의 그것과 同一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다른 그리스도 혹은 천사보다 더 고귀한 직책이라 하리만큼 신성하고 또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성세를 받은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갖는 사제직(베드로후서 2·9)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이는 시초부터 오늘까지의 변함없는 교회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제직에 대한 편학적 논거를 제시할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제본연의 존엄성에 대한 시비는 없었고 또 없다손 치더라도 약점이 있을 수 있는 사제의 인간성에 대한 논난으로 사 제의 참모습이 누구의 과오인가를 불문하고 흐리게 될 수 있다는데에 문제가 있다.
특히 공의회이후 평신자 使徒職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계몽으로 하느님의 모든 백성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 反面에 필요이상의 심리적 해방감과 그 연쇄반응으로 그리스도 神秘體의 調和를 흩으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면 이것을 한갓 지나친 피해망상의 속단으로 웃어넘길 수만 있겠는지? 참된 發展은 질서의 안정에서 이루어져야하며 참된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 그 노력에서만 自律的인 相互協助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리스도神秘體에는 확실히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인간적인 것이기에 앞서 神的이요, 聖事的이기 때문에 더욱 귀중하다. 이러한 질서의 상호관계는 확실히 封建君主와 庶民 그리고 고용주와 노동자의 關係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市場商人의 金綫去來관계도 아닐 것이다. 다만 사람의 봉사자와 사랑의 구원을 갈망하는 자와의 관계로 그리스도안에 一致되어야 하는 것이다.
치명자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 주교께서는 누구보다 자기양들을 사랑하셨지만 『너희는 주교 없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主敎 있는 바로 그곳에 敎會가 있다』한 말은 듣는 사람에게 따라 너무 지나친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敎會의 어떤 질서를 말해줌에는 틀림 없다. 그렇다고 敎會가 바로 主敎나 신부만이라는 것은 결코아니다. 神父들이 主敎를 떠나 行動할수 없는 것처럼 信者도 神父를 떠나 活動해서는 참된 뜻에서 그리스도 神秘體의 유기적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없겠다. 모든 사제는 신자를 위해서 있고 그 사제직은 신자에게 받은 것이 아니지만 신자를 떠나서 있을 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제사를 實現하며 그리스도와 같은 位置에 서서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고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주의 백성을 위하여 큰소리와 눈물로써 기구와 탄원을 바쳐올리고 자신의 수고 수단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순명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제를 바라는 신자의 마음은 언제나 순수했기에 그만큼 더 욱 절실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순수한 기대에서 오는 불만이라면 이해될 수 있고 또 마땅히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제의, 중간적 위치라는 특수성 자체가 어떤 거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릇된 생각일 것이고 나아가서는 사제를 신앙의 장해물로, 어떤 비방의 대상물로, 심하게는 어떤 물질적 이용물로 취급한다면 순수하지 못하다 할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자체를 모독하는 것이라 하겠다.
현대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질서안에서의 사랑의 관계를 知的으로 理解하기는 해도 느끼지는 못하는 상태가 더욱 고질화 되어가지 않 을까 두려웁기 조차하다.
우리는 이런 때를 당해서 무엇보다 신앙에 依한 순수한 人情을 아쉽게 생각하며 그러한 人間的 要泰가 司祭의 聖事的 要素와 結合함으로 그리스도 王國을 건설하는 첩경이 되도록 다같이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