癩病보다 무서운 病들이 이 世上에는 얼마든지 있다. 그것들 中의 하나가 無知다. 無知로 빚어내는 社會惡이 얼마나 많은가는 우리가 每日처럼 보고 느끼는 바다. 그러나 無知보다 무서운 病은 兄弟愛가 없는 사람들의 精神的인 疾病狀態다. 利己主義라는 病도 그 하나요 20世紀 最大의 固疾이다. 癩病을 「天刑病」 即 하늘이 주신 懲罰의 하나로 不治의 病이라고 믿고 온 것도 옛날 이야기고 現代醫學의 發達은 「쉽세 傳染하지 않는 病」 「治療할 수 있는 慢性病의 하나」로 規定하고 醫家들은 『癩病은 醫學的으로 克服했다. 이젠 남은 問題는 社會的인 問題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에는 오늘의 世界에서 癩病을 겁내는 사람의 그 「恐怖症」이야말로 癩病患者들보다 더 무서운 病에 걸린 患者요, 病苦에 시달린 患友들을 迫害하는 者들은 그리스도를 迫害하는 20世紀의 惡이라 하겟다. 그리스도는 그들 癩患者들을 兄弟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近日의 新聞報道를 보면 지난 13日, 慶州市外 月城郡 川北面에 所在한 勿川國民學校에서 잇었던 紛糾事件은 우리들의 마음을 甚히 아프게 하는 것이다. 벌써 數年前부터 이 問題가 報道되더니 마침내 所謂 未感兒童對 一般兒童의 投石戰으로 이것이 擴大되어 双方父兄들의 亂鬪劇에게까지 번져 双方에 重輕傷者를 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비단 勿川國民學校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到處에서 종종 들은 일이다. 어린 兒童들이 저지른 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深刻하다. 兒童들의 어린마음에 이와같은 그릇된 恐怖症을 심어놓은 것은 父母다. 童心은 天主님이 가장 종하하시는 터라, 童心에서는 이런 作亂이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未感兒」라는 말 自體가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말은 아무 思慮없이 누가 처음 시작한 말이겠는데 父母中 하나, 或은 双方 다 患者에서 태어난 兒童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 兒童이 곧 癩病한 患者란 말은 아니다. 病에 걸렸으면 벌써 患者라고 불려 隔離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癩病보다 더 傳染이 쉽게 되고 더욱 癩病率이 높고 더욱 무서운 結核患者家庭의 兒童들은 왜 未感兒라 하지 않느냐. 다른 病患의 兒童들을 未感兒라는 「罪名」으로 배움의 터에서 逐出했다는 말은 아직 들은 일이 없다.
世上에는 自體의 病患보다 더 무서운 病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부모들의 악한 表樣, 飮酒, 亂暴, _打, 作妾 등 헤아릴 수 없어 많은 社會惡의 素因을 자행하는 家庭이 있는가 하면 道德을 害치는 惡習을 예사로 생각하는 厚顛無恥한 成人들의 子女들은 登校에 아무 制限이 없다. 매독이니 임질 등 성병환자의 子女들이라고 해서 未感兒라고 불리운 事例를 우리는 듣지 못했다.
더구나 父母의 症病을 탓해서 그 罪없는 子女들이 배움터에서 迫害를 받앗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없다. 國家와 民族을 敵手에 넘긴 間諜의 子女 殺人强盜의 子女라고 해도 그 父兄은 法에 따라 應當의 處罰을 받지만은 그 兒童들은 오히려 社會의 同情과 保護마저 받는 터에 癩患者들의 子女만이 不當하게 迫害를 받아야만 할 理由를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癩患은 쉽게 傳染되지도 않는다고 하지 않느냐. 쉽게 傳染되어 그 菌을 쉽게 人工培養이라도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벌써 「노벨」賞 受賞者가 몇사람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癩患者의 60%는 陰性患者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癩患者의 아버지 라울 폴로로는 癩病과 結核病中 하나를 擇해야 한다면 『나는 즐거이 癩病을 擇하겠노라』고 외치고 있지 않느냐. 或者는 말하기를 啓蒙의 不足과 無知에서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無知가 患家出身 兒童 迫害의 原因이라고 한다면 「아프리카」를 위시해서 우리보다 後進한 나라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나라에도 우리와 같이 童心에 못받는 만행은 저질지 않는다. 未感兒라는 말도 없거니와 患兒들도 一般兒들과 같이 登校하며 一般病과 같은 치료와 보호를 받고 있다. 勿川國民校의 경위뿐만 아니라 各處에 종종 있었던 소위 未感兒 박해의 경과를 살펴보면 반드시 無知에서라고 하기 보다 20世紀 最大의 고질인 利己主義라는 만성병에 基因햇음을 알 수 있다.
20世紀의 世界的인 悲劇은 人類가 이 무서운 病에 걸렸을 뿐 아니라 所謂 經濟成長이라는 物質主義에 눈이 어두어 이 病은 더욱 痼疾化되고 더욱 慢延一路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世紀의 惡性疾患에 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輕한 癩患을 치르는 것이 福되지 않느랴. 이 世紀의 病患을 治療하는 길은 去 3月 28日에 바오로 6世 聖下께서 반포하신 「人類發展」의 회칙 精神을
遵守하여 「兄弟愛」가 人類 속에 理解되고 具現되는데에 있는 것이다. 오늘도 山間僻地 或은 都市의 거리를 헤매며 우리의 患友들이 받는 受侮와 迫害를 想起하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兄弟요 우리의 兄弟들이다. 우리가 受侮를 當하고 迫害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受侮를 받고 迫害를 받는다. 예수님이 登校拒否를 當하고 投石을 當하고 울고 있음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