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자 일간신문엔 몹시 충격적인 한 사진보도가 있었다. 부산 체신청에서 때아닌 화재가 일어나 교환 「아가씨」들이 5층에서 뛰어내리는 극적인 장면이 그것이다. 「必死의 脫出」이라면 어디서본 영화제목 같지만 이건 영화도 「몽따쥬」 사진도 아닌 엄연한 현실속에서 화마에 쫓긴 젊은 처녀들이 덧없는 공간속에 자신의 목숨을 투척하는 극열하고도 처절한 순간이다. ▲21세 부터 24세 까지의 꽃다운 젊은이들. 마치 그것은 막막한 가을창공에서 어디로 떨어질까 몸을 떠는 가랑닢 처럼, 허공에서 가눌길 없는 목숨이 처절한 생의전율을 겪으며 추락한 것일까? 결국 사람은 어느때라도 한번은 죽고, 죽음은 어떤 의미로 완전무결한 것이라면 아마 이런 요절은 긴 인생을 한순간에 한꺼번에 치뤄버린 集約된 生이아닐까. ▲흔히 사람은 이런순간에 神의 存在나 섭리에 대해 회의를 가진다. 그래서 어느날 작가 까뮈는 교통사고로 인한 한청년의 참사 앞에서 그의 머리위에 너무도 무심히 개여 있는 하늘을 쳐다보고 『하늘은 왜 침묵만 하고 있는가』라고 마음으로 절규했다. 확실히 세상엔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는 불의의 참사가 얼마든지 있다. 원죄라 하지만 그것조차 인간은 평등하게 치르는 것이 아니고 보면 불가사의하다. ▲성경에는 나면서부터 장님이된 아이를 가리켜 어떤 이가 예수께 이르되 이 아이는 자기의 죄탓이냐 조상의 죄탓이냐고 묻자 예수께서 가로되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렇게 태어났다고한 구절이 있다. 『천주께 영광돌리기 위해…』 이 말은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참으로 감독하기 힘든 초자연적 신비며 믿지 않는 자에겐 어떤 「반항」을 느끼기 조차할 것이다. 믿는자 역시 그 신비를 터득하기 위해 얼마나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 인생의 엄청난 괴로움과 부자유를 감당해내야만 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불가사의 한 참극 앞에서 제나름의 느낌이 다 다를 것이다.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한 나머지 어떤 自然의 무관심에 통분을 느끼는 자는 오히려 인간의 편이라 좋다. 나만이 그 참사를 모면한 것만을 다행으로 연민도 동정도 따라서 인간 고통에 대한 아무런 연대의식도 못가지는 무감동한 자는 우리의 편에 넣을 수도 없다. 또한 인간의 有限性과 無力함을 솔직히 깨달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사랑을 지니고 神의 팔에 의지하려는 자는 이미 은총을 대면한자가 아닐가. ▲이같은 경지를 두고 헷세는 말했다. 『모든 생명이 한몸으로 굳게 뭉치는 생활만 내것이 된다면 그리하여 서로 긴밀히 연결된 생명의 연줄을 느낄 수 있고 언제까지나 사랑이 살아 있다면… 마음은 아프고 긍지는 산산히 조각이 나더라도… 나는 침착하고 겸손하고 성숙해지고 생기를 되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