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宗敎건 生活化되어야 宗敎다워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敎會쪽에서나 敎人쪽에서나 원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지나치게 生活化됐을때 우리는 평생을 두고 마시는 空氣를 意識하지 못하듯 「그저 있는것」에 지나지 못하게 할때가 있다. 그때 그의 神은 죽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몇해전 西班牙映畵를 보았다. 어떤 山賊頭目의 사내다운 一生 그린 내용인데 오락영화로는 西班牙 사람들의 原色的浪漫이 짙게 풍겨 괜찮은 편이었다. 그 줄거리는 완전히 잊어버렸으나 이 영화의 한「신」만은 잊을 수 없이 나의 腦底에 찍혔다.
山眬一黨이 먹을 것을 求하러 部落으로 내려온다. 길가에서 善良한 農夫를 희롱한다. 農夫는 살려만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아무까닭 없이 그들은 한칼씩 찔러 죽인다. 깔깔 웃어대며 숨져가는 한 생명의 가련한 꼴을 구경한다. 그리고… 그러며 그들은 저마다 가슴에 성호를 긋는다. 깔깔 웃으며 숨지는 꼴을 비웃으며 성호를 그으며…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난다.
西班牙사람들의 生活속에 가톨릭이 어느 정도 깊이 그리고 오래 뿌리 밖혔는지는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生活化란 중요한 宗敎的要因中에는 이런 「죽은 習性化」가 쓸기 쉽다.
영화이야기는 極端的 표현이지만 우리주변에서도 이와 비슷한 敎人들의 「버릇」이 자주 발견된다. 종교적 탈을 쓰고 또는 종교란 이름을 팔며 나쁜짓을 하는 어떤 孤兒院長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몇대를 두고 가톨릭에 이바지한 家門의 어떤 아들에게서 부터 이런 「죽은 習性化」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敎會의 식구가 줄었다 불었다도 문제이겠지만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퇴화과정이 더 오늘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 안을 무엇 무엇이라고 제시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몇해 전에는 一部 聖職者들한테서 퇴화과정의 요인이되는 그 관료적 권위주의 같은 것을 느꼈는데 요새는 퍽 다정스러워진 것 같다. 常人이라도 괜히 따로나서 도도히 버티면 촌스러워 보이는 것인데 聖職者는 더 하다.
내가 생각하기엔 聖職者란 알뜰한 看守정도로 도도했으면 한다. 刑이 끝나기까지의 罪人들을 알뜰히 보살피다가 刑이 확정되면 그것을 집행하는 祭主가 되는 것이다.
看守가 너무 관료적이면 罪人들이 罪意識을 느끼기는커녕 더 惡化하는 것이 아닐까… 「죽은 習性化」의 예방은 우선 聖職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고 주먹구구식으로 생각해본다.
▲본란 「일요한담」을 오늘부터 南郁(요한) 선생께서 집필하게 되었읍니다.
그간 5個月餘, 20回에 걸쳐 外遊 中에도 꾸준히 쉬지 않고 玉稿를 보내주신 詩人 具常 선생과 여러 독자들의 성원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자 註)
南郁(한국일보編輯訓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