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주교님」에 대한 關心
서울대교구장이던 노 대주교님이 은퇴한지도 어언 2년이 지났다. 그후 서리(署理)가 임명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서리」를 못 면하고 있다. 서울대교구장은 한국 수도의 주교다. 그 임명이 직책인 만큼 막중하여 무척도 어렵다. 혹 우리의 탓이 아닌가? 흔히들 본당신부가 오래 缺席일때는 「벌」인줄 생각했다. 교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천주님이 주시는 벌일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천주의 백성구실을 못해서일 것이며 사랑, 협조, 형제애의 결핍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습관이나 전통, 심지어는 법제화된 것처럼 후임 서울주교 임명에 관해 「이는 오직 성직자들만의 일」 혹은 외부(?=신자)에게는 형무소 담벼락처럼 쳐다보기조차 힘든 「비밀」로 근엄히 눌러 놓는 듯한 인상이다. 14만 서울대교구 신자는 자기들의 후임 목자가 누가 유력한지 알거나 바랄 권리가 발표될 때까지는 차압당한 형편이다.
그런데 천덕구러기 부엌때기처럼 신자들도 무관심하거나 아예 잊고 있다. 그러니 훌륭한 「우리 주교님」을 바라는 기도란 생각도 못할 일이 아닌가?
李끌레멘스(서울명동성당 신자)
■ 「가난」을 알자
한국은 가난한 나라다. 그래서 그렇게 흔한 가난을 모른다면 누구나 바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가난을 외면하고 있기에 가난을 모르는 것이다. 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는 많은 사람 들이 가난을 모르거나 외면하기에 얼마나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금전을 부담하는 것은 자기희생이요, 자기생활의 커다란 부면을 바친다는 것을 모르고 쓰고 남는 것으로 바치겠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과연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뜻대로 준행하였는가? 쓰고 남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쓸곳은 많지만 그 돈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다.
평신자뿐이 아니다. 성직자들이 가난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택시 값이나 좋은 음식 값 내지 개인 소유의 호화로운 물건 값을 줄여 가난한 사람에게 주거나 교회사업에 보태어 쓸 줄 모르는 성직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돈은 자기의 생활(그 생활은 전체를 하느님의 뜻대로)을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 줄 모르고 있거나 외면한다면 그것도 커다란 불행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은 돌볼 줄 모르고 부유한 사람의 신부, 교회가 되는 비극은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내의 경우 가난한 가정을 방문하는 신부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 한국에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돌볼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업이요, 전교사업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가난을 외면하고서는 진정한 일, 더구나 그것이 종교사업일 때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일로 전체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중요한 한 부면이 무시되고도 전체가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생각일 것이다.
이상재(서울 이태원 주일학교 교사)
■ 「이성당은 내 것」
흔히 「협동정신」 또는 「단결심」이 부족하다고 열심한(?) 교우들은 말한다. 사실 뭐가 그렇게도 바쁜지 미사가 끝나면 주일이든 평일이든 미사통상문이나 미사포를 서둘러 챙기고 빨리나가려고 소란하다. 내가 영세한지 만2년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지내는 분은 손꼽을 정도다. 물론 대화의 결핍에서 빚어진 절대적인 현상임을 잘 알고 있다. 대화 속에서 이웃을 찾을 것이고 또 형제라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우가 『이 성당은 내 것이다』라는 맘가짐만 있으면 좀더 관심이 있을 것이고 관심이 있으면 성당주위라도 한번쯤 둘러보고 간다면, 그 시간적 여유 속에서 서로가 미사 끝난 후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쯤 오고갈 것이다. 그러면 그 대화 속에서 「너와 나」]를 알게 되리라. 아울러 「이 성당은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인식을 갖게 해 줌은 모든 교우들의 관심과 용기를 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 것인 줄도 모르고 방관하게 지낸다면 협동이란 낱말은 한낱 구호에 끝날 것이다. 부드러운 대화 속에서 협동정신이 정상화될 수 있으리라.
백권흠(경남 밀양읍 내일동 성모성심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