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앞을 물밀듯 지나가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며 「크락숀」 소리에 짜증이 날 정도이다. 아프리카 어느 지방에 흑인 추장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전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렷다. 그는 두 종들에게 온종일 여러가지 악기로 자기의 근심을 잊어버리게 해달라고 했다. 우리 주위에는 구태어 남의 수고를 빌릴 필요없이 여러가지 소음이 연주(?)되고 있지 않는가. 그리하여 머리가 멍해서 무엇을 생각할 여지조차 없다. ▲예수께서 전교에 바쁜 제자들에게 가끔 『너희는 빈 들, 고요한 곳에 가서 잠간 쉬라』하신 일이 있다. 비단 영신생활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달픈 육신생활을 위해서도 『빈 들, 고요한 곳에 가서 쉴』 필요가 있다. 그래서 녹음방초의 이좋은 시절에 빈 들에 나가고 싶다. 그러나 시끄러워서 도무지 머리둘 곳이 없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들놀이는 사회문제가 되어있다. 이 사회악?을 진단하는 견해로서는 선거와 관련이 있고 또 특히 젊은 부녀층이 심한 것은 봉건적인 가족제도의 억압에서 해방된 욕구배설이라 한다. 지각없는 어머니들의 지나친 들놀이를 보다 못한 성난 고사리손들은 『엄마야 술마시지 말자』란 항의 행진을 벌렸다고 한다. 어머니들의 이 무슨 챙피인가! ▲어떤 외국인이 일본에서 관광 「버스」를 탔다. 그는 고요한 분위기에서 사방의 자연을 관상하곺았다. 그러나 안내차장이 『왼편을 보십시오. 저것은 무엇 무엇 입니다』 『우편을 보십시오 저것은 무엇입니다』로 재재거리기 때문에 『얘 아가씨 입 좀 닫어』하고 싶을 정도였다 한다. 동(東)이 정적(靜的)이고 서(西)가 동적(動的)이라더니 이렇게 달라졌나 의아심이 간다. ▲요즈음 들놀이 「버스」 안에서까지 장구를 치며 야단법석이니 자연 관상은 커녕 그 광난(狂亂)이 참사를 안빚어내고 견딜 것인가. 부라질의 숲에, 「알프스」의 꼭대기에는 못갈망정 우리 주변에 「고요」의 자리를 되찾아야겠다. 이 「고요」는 물과 공기처럼 사활(死活)의 중요한 불가결의 현실이다. 외국의 어떤 해수욕장에 「트란지스트」의 휴대를 금하고 있다. ▲「고요」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좀 무서운 것이다. 천체와도 같이 위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의 소란과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자를 부른다. 그리고 이 절대자 앞에 우리 자신을 두게한다. 그러면 우리의 본연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빠스갈은 『무한한 이 공간의 영원한 고요는 나를 두렵게 한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