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皇聖下께서는 今5月달의 祈禱意向으로 傳敎地方에서 『文化와 藝術이 信心傳播에 活用되기』를 命하고 계신다.
西歐와 같이 그 文化 自體가 그리스도敎를 土臺로 形成發展된 各國에서는 傳敎와 文化 또는 藝術의 관계가 再次 論謂되어야 할만큼 重要한 課題라 할 수 없거니와 傳敎地方에 있어서는 大端히 重要한 問題라 하겠다. 文化의 올바른 成長은 그리스도敎 精神을 基調로 해야한다는 것을 우리는 確信하고 있기 때문이요 또 各種 藝術이 信仰生活에 주는 影響이 至大할 뿐만 아니라 藝術이 곧 人間의 信仰告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리스도敎的 文化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우기 그리스도敎的 藝術에 있어서는 未開地요 荒蕪地라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間或 基督敎나 가톨릭 藝術人들이 作品을 試圖한 바 있다고 해도 西歐의 것을 模倣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輸入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意味에서 韓國은 아직 그리스도敎를 輸入宗敎로 생각하는 人士들이 많은 것처럼 그 藝術에 있어서도 西歐의 植民地를 면치 못하고 있는 터이다. 그리스도敎會 藝術과 가톨릭 藝術을 區別해서 말한다면 가톨릭 藝術은 더욱 찾을 길이 없는 形便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그리스도敎 自體가 土着化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版局에서 가톨릭藝術活動을 한다는 것은 藝術人들 自身으로는 大端히 어려운 課業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降雪이 없는 熱帶地方에서 雪夜의 「크리스마스」를 묘사하는 至難한 일과도 같은 것이요 벼農事를 모르는 北歐人에게 韓國의 農村을 主題로 한 作品을 理解시키려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에 韓國의 가톨릭 藝術人들의 藝術的 資質과 努力이 倍加되어야 하며 苦悶도 더 많음을 認定해야 할 것이다. 5月의 祈禱意向을 契機로 우리의 가톨릭 藝術人들의 一層 분발과 그 藝術을 傳敎에 바칠 각오를 새롭게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藝術人이 天主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그 藝術밖엔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과 關係해서 本社가 丙寅殉敎百周年記念事業의 一環으로 募集한 文藝作品審査結果를 보면 應募作品 數 總96편으로 그 數에 있어서는 決코 적은 數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質에 있어서는 失望的이라 아니할 수 없다. 豫審을 通過한 것은 小說, 戱曲, 各7編으로 그 以外의 것, 即 豫審에서 落選된 作品들은 대개가 作品의 形式을 갖추지 못했고 더구나 그 內容에 있어서 作者의 意圖나 表現이 잘 理解가 가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二審을 맡아 手苦해 주신 審査委員들의 選後感을 보면 戱曲部門에서나 小說部門에서나 다, 素材나 意圖는 讚揚하면서 作品構成과 묘사 등 技術面의 未熟을 指摘하고 있다. 그 結果, 當選은 戱曲에서 單一篇뿐, 小說에서는 佳作과 奬勵가 各 一篇으로 意圖와 努力에 比하여 收穫이 너무 허무했다는 感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藝術作品은 創作하는 것, 即 만드는 것이며 낳는 것이 아니다. 創作技術은 文學徒의 初步的인 問題다. 아무리 좋은 素材라 할지라도 作品을 만드는 技術이 없이는 文學作品으로서의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좋은 말, 착한 말들을 文學의 形式을 갖추지 않고 羅列만 했다고 해서 作品이 될 수는 없는 것으로 그것은 說敎集에 지나지 않는다.
萬一 거기에 感動마저 주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敎會用語를 많이 쓰고 素材를 敎會와 關聯된 周邊에서 잡았다 해도 宗敎小說이나 戱曲이 될 수 없는 것이다.
「聖堂냄새」를 피운다고 가톨릭小說이나 戱曲이 될 수 없음은 再言을 要하지 않으리라. 우리가 期待하는 것은 眞正한 文學作品이다.
勿論 敎會文學이라고 할 때와 가톨릭文學이라 할때는 嚴密히 區別되는 것이지마는 要컨데 文學的 「이미지」와 그리스도敎的 感覺이 調和되어 거기에서 「가톨리시즘」의 높은 香氣가 풍겨나야 비로소 文學作品으로서의 眞價를 發揮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가톨릭 文學이라고 할 때 讀者가 가톨릭 信者라는 말은 決코 아니다. 所謂 作品行爲에서 局限된 主人을 意識할 수 없다. 敎友만 읽는 文學作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萬一 있다면 그것은 御用文學에 不過할 것이다. 「天主」나 「神」이란 用語를 팔았다고 敎會文學이 되는 것이 아님은 前述한 바와 같다.
앞서 우리는 韓國的인 風土와 「가톨리시즘」의 土着化라는 問題에 言及한 바 있거니와 가톨릭 文學人은 日常生活 속에서 어떤 對象에서 그리스도者의 「눈」이 必要한 것이다. 그리스도者의 눈으로 韓國的 風土를 보고 그것을 作品化 해야 하는 것이다. 가톨릭的 素材라고 해서 註解나 說明 없이 未信者가 理解할 수 없는 作品은 벌써 外國의 飜譯物이 되고 마는 것이다. 解說의 部分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文學이 되기 위하여 또 가톨릭文學이 一般化 되기 위하여는 이 두 部分이 作品 속에 融和되어 하나의 完成된 文學作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本欄이 5月의 祈禱意向과 關聯하여 가톨릭文學에 대한 所感의 一端을 記述해 본다고 해서 우리의 가톨릭文學徒나 今般의 應募者 諸君의 文學的 精進과 그 作品들을 過小評價 하려는 것은 決코 아니다. 諸君들은 많지 않은 가톨릭 文學同志로 貴한 存在이기에 5月의 祈禱와 더불어 더욱 더 그 使命感 속에서 奮發 精進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