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관을 쓰고 司牧장을 짚은 근엄한 주교는 한교구의 최고목자이며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고 어진 아버지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분임을 우리는 잘 안다. 베드로나 바오로 그밖에 사도들이 관을 쓰고 지팡이를 가지셨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마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옛날의 신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오늘의 신자들과 주교들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 이런 관계는 그리스도의 한 우리안에 있는 洋인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절실한 것이 되어야겠고 육친관계 이상의 온정을 느낄 수 있어야 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신자들의 최대의 공동관심 사이기도하다. 한나라에서 우리에게 직접간접 영향을 주는 대통령 도지사 기타 상하 관리들의 거취에 우리는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
과연 우리 신자들은 우리주교들의 거취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진다.
본시 주교는 오늘날 처럼 많은 성직자들을 거느리고 명령계통을 사무화해서 교구청 깊숙히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정에서 가정으로 옮겨가며 이루어진 본당의 주임이었고 그 가정수가 많아짐에 따라 구역을 정하고 혼자서는 도저히 방문하거나 한곳에 모으지도 못하게 됨으로 자기를 도와서 신자들의 영신사정을 돌보게끔 신부들을 안수하여 자기의 일을 대행케 했던 것이다.
오늘날 주교들이 비록 현실적으로 사목일선에서 본당신부들처럼 활동하지 않는다 해서 각 본당신부들이 주교가 된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단 한분의 목자인 주교님을 보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주교들과 신부들은 신자들을 위해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자이며 하느님의 어지신 부성(父性)으로 신자들을 보살피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주교 그리고 그를 보필하는 신부들과의 상호관계는 인간적 품위나 이해관계로 성립된 상하의 직책관계가 아니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생명을 더욱 알차게 길러갈 수 있게끔 성주께서 마련해주신 神위적이요 全人的 질서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댓가로 연결된 사랑의 가족관계 이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가족관계라 해서 조직이 필요없고 질서가 유지되지 않아도 좋겠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이런 절실한 관계를 다시 한번 상기시킴으로써 아름다운 관계를 실감있게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고자 할뿐다.
신부없는 본당이 있을 수 없고, 주교없는 교구의 신부들은 어버이 없는 철부지 자식이 되고 만다. 하겠지만 주교없는 교구의 신자들은 과연 자기네들의 참 어버이신 주교님을 자기들 본당신부들을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질적으로 차이는 있겠지만 한 가정에서도 의붓아버지를 모셔들였을때 의붓아버지로 느끼게되는 한 그 무엇인가 어색하고 석연치 못한데가 있을 것이고 한 교구를 대가족으로 볼때 의붓자식이라는 생각이 가셔지지 않는다면 역시 어색하고 석연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어버이가 늙고 병들었을때 안타깝고 애석하게 느껴지고 최선의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되는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선열들은 항상 하느님께 착한 목자를 주시도록 탄원의 기도를 드렸고 목자를 찾아 모실려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꾸준한 노력을 계속했었다. 그리고 특히 안드레아 김신부님의 목자를 맞아들이기 위한 영웅적 노력과 고초는 너무나 잘아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도 뒷뜰에서 아쉬움에 시달려 지쳐버려서 용기를 잃어서는 안되겠다.
교구와 본당의 일이 곧 내 자신의 일이란 참된 모습의 교회참여 의식을 되찾어야겠고 모든 성직자들과 더불어 보람있는 일을 위해 용기있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다. 백성의 소리는 곧 하느님의 목소리라 했다. 선의의 노력과 밝은 날의 과감한 행동은 옳은 일이라면 반드시 관철되고 말 것이다. 교회의 모든 인사행정에 왜 그마져도 비밀이 많은가 하고 비난 하기전에 각자가 얼마만큼 과연 교회에 참여의식을 가지고 노력해 왔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공익을 위한 일시적 침묵을 인정하되 고질화되어 모든 것에 장막을 드리우게 된다면 이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황 성하의 대리자인 교황대사 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과 노력을 경주하여 한국교회의 가족적 발전을 도우려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때문에 우리는 다함께 거룩한 일에 도와드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 장막이되어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해줄 수 없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의 수효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입은 더욱 무거워질 수 있을 런지 모르나 듣고 싶어하는 절실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날이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우리는 치명부제 라우렌시오가 치명장으로 나아가는 교황을 붙잡고 어버이없는 자식이 있을 수 없다고 애원하며 같이 데려가 주기를 원하던 심정과 우리선열들이 만주벌판에서 또는 황해바다에서 목자를 찾아 얻을 려고 백절불굴의 용기로 어려움을 극복해가던 모습을 연상하며 우리주교님들에게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여 항상 착한목자를 하느님께서 상주시도록 기구하며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