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NC 「뉴스」에서 은근히 기대했던 記事가 있었다 그것은 『맑스主義者와의 對話가 危險하다』는 어떤 神學者 - 公議會서 世界에 이름을 떨친 칼 라너 神父 - 의 談話를 전한 것이었다. 2년前 公議會 敎父들이 맑스主義者들과의 對話를 推進하고 있었을 때 筆者는 PISA 會議를 마치고 中共에의 望棲인 「홍콩」에 滯留하고 있었다. 中共의 情報分析으로 有名한 ㄴ 神父의 초대로 그의 作業을 열흘동안 곁에서 지켜볼 수가 있었다. ㄴ 神父와 그의 協力者들은 現代共産主義硏究의 第一線 담당자로서 맑스主義者와의 對話에 關해서 敎父들에게 警告의 서한을 作成하고 있었다. 그 主張은 우리들에겐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맑스主義의 現實을 피부로써 맛보지 못한 유렆 주민들 더구나 學者들은 相對方에 對해서, 대단히 위험하며 安易한 好意마저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후 우리의 記憶에 남아 있는 것은 「살쯔붉」에서 한번 또 얼마전에 첵코에서 한번 맑스主義者와 가톨릭 神學者의 對話가 있었는 듯 한데 문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나는 反共運動의 효상 알베르티니 氏로부터 가톨릭 神學者는 결국 준비없이 對話에 臨하여 맑스主義者의 計略에 말려들어가 政治的으로 利用당했다고 맹렬한 비난을 들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를 迫害하고 있는 맑수主義者와 교회의 對話가 鐵의 장막 뒤에 살고있는 그리스도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알리가 없다. 칼 라너 神父는 神學者다. 이제사 겨우 그 危險을 自白한 것은 不幸中多幸이다. 일찌감치 共産主義者들의 生理를 아는 一線專門家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을 것을. 하지만 맑스主義者들이 우리와 同一한 言語를 使用하게 될 때까지 努力을 해야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對話를 通하지 않고 어떤 形式으로써 追求되어야 하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여기엔 神學者가 아니라 人間에게 잃었던 對話의 실마리를 풀어준 교황 요안 23世의 따뜻한 人品 - 그것은 그리스도의 人間性과 溫情의 攝理的인 反映이겠지 - 과 성신의 은총이 있어야 겠다. 
             金太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