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존슨」 대통령의 맏사위 참즈·로브 海兵大尉가 월남전에 轉屬되어 그를 보내는 비행장에서 新婦 린다양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와 電送사진이 날아왔다.
이미 지난 2년간 미국은 월남이란 아세아의 낮선 땅에서 1만여명의 人命을 잃었고 수만명의 중경상자를 내었다. 오늘도 50여만의 미군이 이 血戰을 벌이고 있다. 로브대위도 그 50만 將兵의 한点으로 끼이는 셈이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 個人出兵이 새삼스럽게 기사나 전송사진감이 되는 까닭은 社會者名人士의 子弟와 관련되었다는 보도의 관습 때문일 뿐이다.
個人의 道義나 나라의 道義가 제대로 지켜지는 사회에서는 그 개인이 大統領의 아들이건 이름 없는 농부의 아들이건 이 경우 다같은 50만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이 韓國의 경우라면 큰 記事감이 된다. 너무나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6·25때 고관대작의 아들딸들이 전장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보다 먼나라에 유학한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다. 로브대위가 한국 사람이고 6·25때 어떤 高官의 사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도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保守的」이란 말을 나에게 해당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保守性을 가끔 발견한다. 이를테면 내 딸이 現代무용을 전공하려는 경우를 생각한다. 나는 누구보다 현대무용 보기를 좋아하고 그 藝術的價値를 높이 評價하고 싶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막상 내 딸이 半裸體로 무대에서며 예술적 감각이 얕은 觀客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대답을 망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하지만 「觀客水準이 높아진 다음이라면 몰라도 아직은 찬성할 수 없다」는 정도로 엄버무일 것 같다.
외국뿐 아니다. 우리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王族이나 高官의 子弟가 나라를 지키는 마당에서 쓰러진 자랑스러운 史實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요새는 무슨 까닭에 公私함께 名分과 體面없는 사회가 되었을까.
최근의 한가지 예를 京畿中學낙방생의 소송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학부형들이 교장을 세종호텔에서 協商하자고 불러 言質을 받을때까지 내보내지 않는 다고 감금했다. 이때 어떤 어머니가 교장에 삿대질하며 면박하는 보기 흉한 사진이 찍혀왔다. 어처구니없는 세태의 일면이었다. 교장에게도 잘못이 있을지 모른다. 나도 억울한 採点을 당한 受驗生의 아버지었다.
그러나 그렇게 삿대질을 한 스승의 밑에 子弟를 보내서 무슨 교육이 되겠으며 그렇게 삿대질 당한 스승이 그 자제를 맞는 마음은 또 어떠하겠는가. 더욱 法에까지 호소해서 師弟가 原被告의 자리에서야 하는 오늘의 社會를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공사의 분리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사의 기본인 교육과정까지가 이 모양이고서는 사회의 명분이나 체면을 기대할 날은 먼 것 같다.
南郁(한국일보編輯訓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