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月 5日은 韓國人 最初의 司祭이신 金大建 神父의 紀念日이다. 金 안드레아 大建 神父는 1846年 9月 16日 한강 백사장(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殉敎하셨다. 今年은 金 神父 殉敎 百21週年이 되는 셈이다. 당시 金 神父는 神學 · 哲學에 뿐만 아니라 先進 구라파의 文化를 받아들이는데 한국의 「파이어니어」적인 존재였음은 歷史가 증명하는 바이며 金 神父를 사형하는 정부당국에서도 김 신부의 죽음을 애석히 생각했었다.
그는 司祭品을 받고 불과 1년밖에는 司牧生活을 하지 못했지만 한국敎會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金 神父는 韓國人의 첫 司祭로서 마치 「모퉁이돌」이 된 그리스도와 같이 이 나라 敎會의 「모퉁이돌」의 구실을 했으며 더구나 그의 탁월한 순교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을 금치 못하게 하는 바이다.
韓國敎會의 창설자 안드레아 金大建 神父가 이 땅에 피를 쏟아 眞理를 證據한지도 百20年이 흘렀건만 그의 피로 가꾸어진 오늘의 한국敎會相을 보건데 실로 부끄러움이 앞선다.
金 神父의 유해앞에서 우리는 자못 자랑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후예로서의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다.
聖雄 金 神父의 祝日에 우리는 몇가지 反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우리들의 「순교자 현양의 정신」 결핍이다. 歷史家 에르뜰리아누스의 그 유명한 구절을 또 다시 인용함다면 『殉敎者들의 피는 그리스챤들의 씨앗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우리가 永生의 信仰을 받았다는 것은 오로지 순교자들의 선지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진데 우리는 모름지기 순교자들의 후예로서 그 신앙을 어떻게 실천해왔으며 우리 순교자 선조들에 무엇을 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昨年 병인순교 百週年記念行事가 그 때를 놓치고 今年으로 미렬온 것으로 아는데 이 해도 벌써 그 전반기가 지나고 후반기에 접어들었건만 순교정신 현양에 대해서는 어찌 일언반구도 없느냐?
우리가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는 26位 새 福者들의 시복식은 어떻게 된 것이냐? 작년 百週年紀念에 시복식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더니 또 다시 연기되어 금년 부활절 전에는 틀림없을 것이라더니 이제 백주년도 지났고 부활도 지났다. 또 무엇을 기대하란 말인가? 그렇게 대단치도 않은 일에는 「싸인공세」를 한다. 로마 교황청으로 진정서를 보낸다고 요란하건만 어찌 우리 순교자들의 시복식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침묵 뿐이냐?
진정 순교자들의 후예로서의 긍지와 자각이 있다면 어찌 한국가톨릭 70만 신도들의 여론을 조성하여 성청에 우리의 의사를 전달할 「시복식촉진위원회」라도 구성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리는 그만큼 무언가 근본정신을 잃고 테두리를 돌고 있는 韓國敎會가 아닌자 자못 걱정스럽다.
둘째로 金大建 神父는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主保이시다. 누구보다 이날 한국의 聖職團은 金 神父의 精神을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그의 탁월한 정신을 받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다.
한국 사제의 전형적 「모델」이신 안드레아 金 神父의 위대한 司牧生活, 불타는 순교정신 그것과 오늘의 한국사제들의 司牧生活과 私生活이 과연 하나의 正比例를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反比例를 이루고 있는지? 一省의 機會를 주는 金 神父의 祝日임을 알아야 하겠다.
셋째로는 벌써 본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제 일년동안은 「信仰의 해」로 접어든다. 교황의 말씀을 듣건데 사도 베드루 · 바오로의 순교 1900년 기념제로서 그들에게 바쳐지는 「信仰의 해」라고 한다면 우리도 이 땅에서 한국의 초대 사도 김대건 신부의 순교기념제로 「신앙의 해」를 더욱 강조하고 싶다.
그만큼 이 時代는 신앙이 아쉽고 신앙이 탈선되었기 때문에 「신앙의 해」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긴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 민족의 신앙을 초대 金대건 神父를 위시한 제위 순교자들의 신앙에 비긴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은 대단히 불안스럽고 위험하고 불성실한 것이 아니겠느냐? 한반도의 巨星 · 聖雄 金大建 神父의 祝日에 우리는 다 같이 우리의 진실한 산 신앙문제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맞이하는 7月 5일의 감격! 우리는 이날을 맞이하여 순교자들의 후예로써 晩時之歎이 없지 않으나 또 다시 분발하여 우리의 선조들의 순교기념제를 하루바삐 서두르고 시복식의 영광된 날이 하루바삐 오도록 제반 방법을 강구하여 우리 후대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유산을 남겨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의 기본된 산 신앙의 무장이 시급함을 역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