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무엇이고 단순히 질문을 위해서 질문을 일삼고 다니는 친구네가 있다. 그들은 생각없이 말하며 하나의 의문에 徹하지 못하고 너무 많은 질문을 나열한다. 겸손과 인내가 없기 때문에 사물의 진실을 시도하려 하지 않고 중도에서 체념한다. 그리하여 해답은 간단하다.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그것은 저녁 하늘에 띄워 보내는 비누포말처럼 찬란하게 영롱져 있는 것 같으나 이윽고 그 흔적조차 사라져 없어진다. 속단에 안주하며 착각에 현혹되고 자각이라는 명사에 속는다.
그리하여 영원히 솟는 샘이 아니었기에 가뭄이 왔을 때 다급하여 「바께스」를 들고 이웃집에 다름질을 쳤다.
확실히 우리는 진리 앞에 겸손하고 사랑 앞에 인내해야 한다. 아침 햇빛은 결코 비약하지 않는 법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어둠을 몰아내는 여명의 과정이 있었다. 왜 이렇게 단번에 밝아오지 않는가고 불만하는 자는 결코 현자는 아니다. 조금씩 밝아오는 그 아름다운 아침 광경의 순수한 경험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진리를 차지하는데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생명의 탄생을 위해 어머니는 인내를 닦고 희망을 품었다. 사물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꼭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회의에 떨어져 음산하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고 아니면 세력에 좌절하여 운명의 노예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우상에 이끌리고 오늘은 동으로 내일은 서로 분주히 쫓아 다녔으나, 고치고 보니 아데네 항구에는 자기가 소유하는 배란 한척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슬피 통곡했다던 옛 희랍의 어떤 광인처럼 환멸에 찬 탄식을 듣는다.
인간의 최대의 비극은 자기가 자기를 믿을 수 없다는 이 위대한 체념을 깡그리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된 인식은 사랑과 더불어 시작하고 모든 회심은 위기와 더불어 시작한다는 말이 있거니와 어느 인생에 있어서나 어느 역사에 있어서나 진리는 고난과 생명의 시련을 통해서 나타난다.
진리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 앞에 박물관의 골동품, 박제된 「페가수스」(PEGASUS)일런지 모른다. 진리는 인내하지 않는 자에게 꿈에라도 다시 볼까 겁나는 추녀, 지독한 사기꾼일런지 모르며 사랑이 없는 자에게 빙결된 「쓴도라」의 광야일런지 모른다.
옛날부터 진리는 양심과 함께 출발했다. 진실의 눈물이 고인 가슴 안에서 속삭였으며 끝내 목말라 못견디어 하는 혼에게 생수로서 나타나며 마음을 다하여 그 소리를 듣고자 하는 혼에게 결국 들려오는 것이다.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깨닫는다라는 말을 그리 자주 쓰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오히려 사랑처럼 침묵하며 끝없이 성장하는 생명이며 화석이나 개념의 체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직 겸손이 있을 뿐이다.
고난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탄피와 신생을 위한 것이다. 무릇 미로에서 해방을 찾고 오늬에서 구원을 갈구하는 자는 확실히 그것으로서 참삶의 출발을 하는 자이다.
우주의 참된 것 영원한 것에 대해 한번도 오뇌해본 적이 없는 자는 아직은 한번도 청춘을 가져보지 못한 자이다. 오뇌를 하되 양심을 다해서 하고 회의를 하되 간절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호기심으로만 하지말고 자기의 인생을 걸고하며 어설피 회의하지 말고 극한에 부딪혀 극복과 해방의 길을 찾기까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의 자세가 서지 않는 사람이 진리를 운운한다는 것은 참에 대한 모독이고 인생의 희망에 대한 사기인 것이다.
묻기전에 사색해야 할 것이요, 판단하기 전에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리석음을 배워야 한다. 어리석은 자 같되 어리석지 않으며 미련한자 같되 오히려 지혜로운 인생을 수업할 필요가 있다.
大賢은 大愚에 가깝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수년전 일본의 모 물리학자는 뉴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모여 온 물리학자의 모임에서 인류사상 뉴톤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비한다면 실로 태양과 같은 위대성이 있는데도 인류는 그의 탄생일을 망각하고 있었다고 개탄하는 연설을 했다는 기사를 일본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물리학에는 지식이 있었을런지 모르되 쏘크라테스 독배의 어리석음, 그리스도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물리학이라는 우상의 집을 짓고 그 안에 폐칩하여 창 너머 바라보이는 몇 그루의 나무를 가리켜 숲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대뇌작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있다.
이것이야 말로 현대가 상실해 가는 어리석음의 빈곤이요 知의 無知인 것이다.
현자는 묻기에 앞서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조용히 듣는 것이요. 듣되 최후까지 인내를 다하고 사랑을 다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계절을 좇아 잎이 나고 가지가 뻗고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 날로 새롭고 지혜롭게 성장할 것이다.
임기석(大建神學大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