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講義를 반드시 對話式으로 하라는 法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 方法은 學問뿐만 아니라 人間理解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의시간에 언제든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한다. 물론 때로는 卽席에 解答을 못하는 일도 있다. 그럴땐 다음 시간까지 解決을 보류한다. 학생들은 그런 일을 처음 당하면 어리둥절 하는 것 같지만 그다음부터는 에사로 받아들인다. 대개는 나는 여기서 토론의 실마리를 잡고 토론을 하거나 한다. 이렇게 되면 敎授의 權威나 先生의 威嚴이 땅에 떨어진다든지 깍인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또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만약에 도전적인 질문이 나올 때 선생의 권위를 세운답시고 학생에게 건방지다니 버르장머리 없다고 야단한다면 벌써 對話는 끊어지고 거기엔 一方通行만이 통한다. 대학강의는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듣는 敎會 보다는 對話하는 敎會가 되었다. 現 교황은 그의 첫 회칙을 對話에 關해서 반포햇는데 교회가 現代世界에 대해서 開放하고 자신의 새로운 偉大한 使命을 理解하며 遂行하기 위해서는 多面的인 對話가 必要하다고 言明했다. 한국가톨릭에서는 對外的으로 新敎나 他宗敎와의 對話의 「붐」을 보았다지만 그 前提條件인 敎會의 對內的對話가 있었다는 소식은 아직 과문으로 들어보지 못했다. 회칙에서 교회내의 즉 主敎와 司祭들, 司祭相互間 牧者와 信者들 사이의 對話가 강조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平信徒들이 철없는 小兒같이 양순하기만 바란다면 그것은 교회를 前公議會 · 前近代的 未熟兒로서 묶어두는 것이 된다. 이것을 피하고 對話가 이루어지자면 思考方式을 뜯어고치는 일이 있더라도 職位의 差別보다 兄弟愛가 앞서야 한다. 『神이신 創設者의 겸손으로써 구원을 成就하는 宗敎의 代表者』는 『겸손되지 않으면 人間은 兄弟가 되지 못하며』 『兄弟愛를 分裂시키는 것은 自負心』이라고 단정했다. (UN에서의 교황의 演說) 그런데 자기가 온전히 교회안에서 生活하는 信者가 아니면 교회안에서의 對話와 비판에 공헌할 資格이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對話는 이 조건으로 可能하다.
金太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