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률이 높아감으로 호평을 받는 우리나라, 자못 흐뭇하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줄었다는 평은 아직 못 듣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청탁」이란 「차넬」을 통하지 않고는 萬事亨通이란 아직 꿈이다. 그리고 萬事亨通은 으례 「돈」이 관권이다. 오히려 「청탁」을 모르면 바보요, 變則국회운영을 못하면 「무능」의 낙인을 찍힌다. 여야의 흥정이 성사하면 위선으로 단장되어 넘어가고 안되면「變則」이 이용되기도 하고. 官民이 이러하니 정말 경제성장이 균등히 이뤄지고 있는지? 국가가 발전하며 인격품위가 향상되는 사회로 나아져가는 것인지? ▲그런데 世上事에 어두운 교회 내 인사들 가운데도 이 「청탁」 成事의 妙手를 잘 알고 곧잘 이용한다. 그러나 정말 세상사에 어두워선지 참말 정직·결백하거나 체면에서인지 일이 끝나면 「감사합니다」란 한마디로 모두를 치룬다. 그러니 「청탁」을 추진하던 일꾼은 정신적으로·물질적으로 소모한 것은 고스란히 「바침」을 고의건 아니건 강요당한 셈. ▲그런데 「감사합니다」란 인삿말이라도 들을 경우는 그래도 상급이다. 문제는 얼마간의 시일이 걸리면 오히려 짜증이고 꾸중이며 호통을 당하기가 일쑤며 되돌아서면 生面不知인듯 對한다니. ▲6.25동란때 이야기다. 서울서 대구나 부산의 친척집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당황은 했으나 의지를 구한 상대가 사돈이라 어쩔 수 없이 반가운척 맞이하고 방도 한칸 비워주고 『같이 고생하자』고 하며 修人辭를 아끼지 않았다. 피난은 서울 사돈은 다급한때였으나 미안하여 座不安席인체 어쩔줄을 모르는데 얼마후 건너방에서는 주인사돈 식구끼리 불고기 「파티」를 자기들만 즐겼다. ▲요즘 서울과 시골을 다녀본 사람이면 휘황찬란하고 어리어리하며 번쩍이는 고급승용차와 돈의 물결속의 서울 모습에 비해 백년을 한결같이 초라하고 가난하기 이를 대없는 시골의 차잇점에 회의와 분노를 느낀다. ▲교황 바오로 6세가 1일의 「메이 데이」 「메시지」에서 노동자의 인격존중, 정당한 보수지불 노동조건 개선을 역설하고 이같은 사회정의를 오른줄 알면서 실천않는 것은 「더 나쁘다」고 호통을 쳤다. 이런 기사를 읽고 기뻐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아픈데를 찔렸구나』하면서도 直言을 함부로 한것에 괴씸함을 참느라 힘겨워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을 볼때 복음을 전할 자나 받을 자 사이의 차잇점을 아직은 발견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