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가 구두창 밑에서 절편처럼 늘어나다. 백납같은 화염이 도회의 길바닥을 딩굴어가면 「빌딩」 안의 「셀라리맨」은 앉은 자리에서 바다로 산으로 피서를 꿈꿀지 모른다. 어떤 시인이 『우리들은 언제 행복을 향해 출발하는 것인가』했듯 『우리는 언제 피서지를 향해 「아스팔트」를 출발할 것인가』하고. ▲확실히 일년열두달 중에서도 이 삼복의 열하만큼 창백한 「살라리맨」에게 견디기 힘드는 때도 없을 것 같다. 음달에서만 지내는 창백한 얼굴이 매마른 창가에서 소음과 열풍에 시들고 머리는 권태에 짓눌려 오히려 텅빈다. 그들은 벌써 여름을 저주하고 있지 않을까? 누구처럼 정녕 「넝마주이가을」이라도 그리운지 모르겠다. ▲확실히 여유없이 현실에만 뒤쫓긴 생활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회의와 과거의 회한뿐 나부끼는 휴지쪽처럼 현실에 정착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무엇인가 항상 현실은 임시인 것 같고 생활은 설익은 열매를 따듯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어차피 당면한 현실을 기피할 수 없는 한 그것을 받아들일 정신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작열히 끓어 오르는 여름을 해피하고 저주하기보다 생의한 부분으로 누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다. 마치 여름이 후회없는 가을을 맞기 위해 그리고 앙클한 겨울에 達觀하기 위해 이렇게도 뜨거운 태양아래 주저없이 무르익어가듯. 그리고 또한 인간에겐 고뇌가 필요하며 그 고외는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보다 깊은 곳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오늘 아침 Y요양소에서 S여류시인으로부터 代筆을 시킨 이런 편지가 왔다. 『내 손은 이제 언제까지 아무것도 쥐지 못한채 있을 것인지 모릅니다. 지난 27일 종부성사를 받았읍니다…참아 받는다는 것, 역시 인간은 참아 받게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왜 진작부터 거부해오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실로 나에겐 주어진 내 몫을 참아 받음이 이토록 어려울진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엄청난 자랑을 거듭 거듭 느껴봅니다.』 ▲창밖 시야를 가로막는 「빌딩」 위에 검은 구름이 몰린다. 「아스팔트」 위에 시원한 비라도 한줄기 쏟아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