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는 그 활동방향에 있어서 두 가지의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해 놓았다. 그 하나는 교회 내부의 개혁이다. 과거에 교회가 고집하던 제도, 법률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권위의 잔재를 포기하고 복음에의 복귀를 지향하여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그 본연의 정신에로 교회내부의 제반제도를 개혁하고 있는 터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바깥 세계에로 시선을 돌려 타세계와 호응하여 교회의 문호를 여어놓은 그것이다. 교회의 문호를 개방했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나가 그들과 접촉하고 대화하고 그들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바깥 세계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수억의 형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외인들도 열교인도 이교도도 아닌 것이다. 천주의 자식이며 곧 우리의 형제들인 것이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도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더욱 귀한, 복음의 정신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거와 같이 「네 영혼을 구하고 싶은 자」는 찾아오라는 태도는 버려야 하겠다. 우리가 상대할 것은 영혼도 육신도 아니다.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을 구해야 한다. 부활은 영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는 것이다. 천주님은 자기 모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다.
과거의 허다한 회칙들은 성직자와 교우들에게 국한하여 호소하더니 요안 23세의 「지상의 평화」며 금차 바오로 6세의 「인류의 발전」에서는 가톨릭신자 뿐만 아니라 「착한 지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교황은 교회가 가진 인간적인 차원의 것을 호소하고 계시지 않는가? 우리의 관심사는 바깥 세상의 인간이며 성바오로의 말씀처럼 「萬人에 萬事」 즉 사람마다 인간은 그 「수요」(需要)가 다를진데 우리는 그 수요를 잘 알고 이해하여야 되겠다.
농촌교회는 농업을 위주로 하는 형제들의 교회다. 농촌의 교회도 다른 모든 본당처럼 과거 기십명 혹은 기백명의 교우들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지역 전체 인간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본당신부는 교우들의 영혼만을 「다스리기」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역주민 전체의 목자로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청년들도 본당일을 돌보고 교회의 회합이나 교리교습에 충실했다고 해서 그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밖에 있는 더 많은 형제들과 스스로 나아가 인간적인 접촉을 할 것이며 넓은 대화의 광장을 모색하여 그들의 요구 · 욕망 · 계획 등을 살피고 그 고민을 이해하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 복음의 정신이 생활을 통하여 반영되도록 ㅏ여야 한다. 전제적(專制的)인 전교 즉 상대의 의사(意思)며 그 시점(時点)의 심경에 대한 아무 고려도 없는 오직 교리만 익혀 영세하게 하여야 만족스러운 전교를 한 것이며 평신도 사도직을 완수했다고 생각하신 그것은 과오라고 하겠다. 예수님은 30년동안 이웃과 생활을 같이 했었던 것이다. 30년의 지상의 생활은 곧 성부의 뜻이었으며 그의 사명이엇던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다.
농촌사회의 지대한 관심사는 농업에 있다. 그들은 농업을 통한 생산증대와 소득의 향상이 우선 절대적인 관심사일 것이다. 가톨릭 청년들로 그들과 공통된 관심사에서 그 형제들과 대화하고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교환하여야 한다. 교회안에서 「레지오」운동을 하는 것 보다 그 지역 「4H클럽」에 가입하여 모범적인 농촌청년으로서 그 활동과 생활을 통하여 복음이 빛을 방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농촌지도자는 만일 한 이동(里洞)에 한사람씩의 독농가(篤農家)가 전국방방곡곡에 있다면 우리나라 농촌문제는 해결될 것이며 농도원도 지도소도 필요없으리라고 했다. 옿은 말이다. 그러나 독농가로만은 부족하다 우리나라에서 독농가라 하면 대개 자기 농장은 훌륭하게 발전시켰고 경이적인 생산량을 올려 국가정책에는 지대한 기여를 했을지 몰라도 인간에게 얼마나 봉사했느냐 하는 점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地域社會 발전에 대하여 가르치는 정신은 바오로 6세의 회칙(回勅) 「인류의 발전」에서 갈파한 것처럼 생산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적분(積分)적인 발전」에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청년은 그 지역사회에 있어서 소위 독농가가 되기보다 「파이롵트」가 되어야 한다. 내가 가진 모든 지혜와 능력 그리고 기술을 아낌없이 형제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농업기술은 정확하고 확실하여야 하겠다.
정확하고 확실한 기술이 생산에서 증명될 때 그 「파이롵트」의 생활과 인생이 권고는 신빙성을 갖게되어 그 지역사회에서, 빛남이 되리라.
이런 의미에서 얼마전 발족한 가톨릭농촌청년운동(JAC)의 노력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바이다.
가톨릭청년은 개혁정신 속에 살아야 하겠다. 항상 이웃의 고민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판단하며 전진하는 농업기술을 형제들과 같이 나누어 다같이 잘살아야 하겠다. 혼자 잘 살 수도 없고 혼자만 화려하게 살때는 벌써 그는 그 지역사회에서 용잡되지 못할 존재가 되고 말것이다 .
이 세상에서 독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도 없다. 기술은 물론 새로운 종자도 다 밝히고 나눠주는 것이 형제애인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정신을 깊이 이해하여 지역사회에 있어서의 가톨릭청년은 그 새로운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로마서(書)」가 가르치는 『생각을 바꾸어, 자기를 개신』 하는 농촌청년이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