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권태롭고 신공도 소홀히 될성 하는 무더운 熱帶性기후에 어떻게 하면 기도에의 구미를 돋굴 수 있을까! 나는 기도의 前奏로서 音樂을 생각해 본다. 美學에서는 진정한 음악이면 그 自體 벌써 聖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그런데 진정한 음악이건 아니건 어떤 음악은 하고있는 신공을 방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음악은 할 생각이 없는데도 기도에로 마음을 재촉해 준다. 聖歌는 그 자체 기도이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共鳴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無視 못할 문제라고 본다. 音響의 다름다움과 天主의 讚美와 더불어 心琴의 振幅數에 相應하는 것이라야 하니까 聖音樂이 어라나 어려우리라 짐작이 간다.
나는 드문 기회에 밧하의 正統을 있는 大家로부터 피아노에 의한 리스트 作曲의 「프란치스코의 새들에게 하는 說敎」와 「파도를 걸어가는 聖 안토니오」를 들었는데 그것은 그저 영혼을 황홀케 해주는 曲들이었으나 퍽 寫實主義的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귀향살이에 시달리는 人間의 모습을 곁들인 被壓迫民族의 苦惱를 달래며 救世主에의 聖鄕과 親密性을 노래하는 黑人靈歌도 기도에의 앞장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感情移入에 재즈음악이 있다. 아마도 實存의 深淵을 내려보며 機械文明 속에 사는 現代人의 宗敎 감정에 맞는 音響세계는 論理的인 밧하의 그것과는 또 다를 것이다. 그래서 듀발 神父의 종교 「샹송」이 言語感의 國境을 넘어서도 人氣가 있다는데 說明이 되는 걸까.
내 先輩중에 秀才가 있었는데 또 天才的 음악가이기도 했다. 休暇別莊에서 그는 即興的으로 피아노를 쳐주어서 우리를 즐겁게도 해준다. 學友들은 그가 당번이 되어서 미사나 성체강복의 반주를 맡아 「파이프오르간」의 「콘솔」에 앉는 것을 기대한다. 언젠가 그는 나의 물음에 슈베르트의 未完成交響曲이 마음을 기도에로 가다듬어 준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理智的인 사람이 어째서 感傷的인 슈베르트를 좋아할까 으아하게 생각했다. 하기야 圓滿한 人格에로의 追求는 그리스도의 內面의 世界에 닮아 가서 知性意의 調和된 균형을 理想으로 할테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의 人性이야말로 神性과의 一致를 抽象하고라도 知性意가 完全한 균형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感傷主義 경계 意識은 하나의 多分히 主知的 「스노비즘」의 소치였나 보다. - 끝 -
金太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