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市를 벗어나서 仁川街道로 얼마 안가면 왼편에 中國映畵에 나오는 「셋트」처럼 보이는 建物이 있다. 어떤 修女院이란다. 시골서 전근해 온 내 눈에는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土着化의 선두를 달리는 듯 최근 가톨릭誌에서 聖歌 등의 한국化가 논급되었는데 교회건축의 한국化 등 문제도 함께 언젠가 또 누군가가 개척해야 할 문제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왓을 때 天主學이라는 西學이 이미 어느정도 順應될 수 있는 口實아래 전파되고 신부들은 우리나라에 喪服의 외무로써 행동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국化의 계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반면에 이것은 一時方便에 지나지 않겠으니까 바로 그 이유로 眞正한 順應은 고려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경계까지 당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공의회서 再確認된 일이지만 교회의 世界普遍性이 강조되면서도 교회는 지역과 각 민족의 固有한 文化와 風物의 多樣性 안에 具現되어 성장해 간다. 여기에도 공의회가 우리에게 맡긴 課題가 있다. 해방전까지만 하더라도 뾰족한 종각의 「고틱」樣式은 天主堂의 標識였다. 교회건축도 近代化했다. 그런데 土着化한다고 절간같이 혹은 儒敎의 經堂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곤란하다. 건축이나 典禮藝術에 있어서 한국 固有의 素材나 造形이 聖된 性格을 띠도록 개척될 餘地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禮典에 있어서 일본에서는 聖體 앞에서 장궤대신 敬禮를 하는데 이런 문제는 典禮委員會에서 다루어지는지 모르겟다. 東方敎會에서는 오른 손을 가슴에 얹고 세번 至聖所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은 퍽 인상的이었다. 어떤 修道團體에서 이런 제안이 나왔을때 주교는 恃險的標本으로 그 소속성당에서만이라도 試圖를 허락하는 권한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하여튼 이제 외국인 선교사이 지배적인 영향에서 벗어나서 한국인 司祭와 평신도가 교회생활형성에 主導的인 位置에 서야할 때가 왔다., 그땐 외국인의 外物崇拜趣味(엑소티씨즘)의 희생도 끝나리라 고대된다. 이 모든 土着化 문제에 있어서 의식적으로라기보다 한국인이 天主의 眞理를 그 源泉에서 파악하고 내면화 하고 생활화 하면 그땐 생소치 않은 가장 자연스럽고 생리에 맞는 한국化가 이루어질 것이다.
金太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