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壽宮에 世宗大王의 銅像이 세워졌다기에 우러러보러 갔더니 黙過못할 구석이 있었다고 高齡한 필적의 投稿가 있었다. 『우리눈에 거슬리는 점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뒷머리가 요새식으로 理髮이돼있는 데는 어안이 벙벙했다.』는 내용이다. 조각가가 무슨 생각으로 4백년전 임금의 머리를 단발했는지 알 수 없다. 상투를 매려면 뒷머리숫이 위로 올라가야하는데 下行일뿐더러 귓전이 곱게 깎여있다니 現代理髮을 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光化門네거리에 세워진 李忠武公의 銅像에도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이 몇가지가 있다. 우선 鬪具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서 非戰鬪的이다. 專門家에 의하면 忠武公이 무릎위에 敵矢를 받은 記錄이있다는 것이니 당시의 鬪具가 그처럼 길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長刀를 바른손에 쥐고 있는데 이것도 臨戰자세라고 보기 어렵다.
라디오 放送劇이나 映畵에서 宮中용어가 많이 쓰인다. ①최근엔 소설에서도 王朝때 이야기가 많이 취급되어 몇백년전의 宮中용어나 市井풍습이 과연 그랬을까고 의심쩍을 때가 있다.
藝術家가 그 人物의 용모나 事物의 형태를 자기 나름으로 「데포메이슌」하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며 또 그래야 創作的인 個性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아주 抽象的인 變形이라면 몰라도 耳目을 갖추게 할 바에는 考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국에서는 藝術家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그 나라의 歷史的人物이나 事件이 小說·彫刻·音樂·演劇등으로 創作化되어 어린이때부터 친숙히 알게 된다. 우리나라서도 몇해전부터 主體性의 發見이니 자기의 재인식이니 하는 바람에 소설이나 라디오드라마 같은 분야에서 그런 노력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무책임한 考證과 興味본위에 치우쳐 「發見」이나 「再認識」은 고사하고 아주 그 人物·사건의 原 「이미지」를 망쳐 놀 때가 있다.
그렇더라도 그런 노력은 계속해야 하는 것인데 가톨릭부분에서는 아직 저조한 느낌이다.
2백년 가까운 가톨릭 史에는 小說이나 演劇으로 꾸밀만한 素材가 상당히 많을 것으로 알고 있다. 記錄이 많으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안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미야모토 무사시」가 記錄이 많아서 여러가지 소설에 취급된 것은 아니다. 간단한 記錄으로도 藝術家의 創作的능력으로 再現시킬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金大連 神父의 일생을 事實만으로서가 아니라 人間으로서 영혼의 갈등 신앙에 고통 죽음을 向한 人間의 흔들림 같은 內面을 잘 묘사 한다면 종교소설이란 좁은 테두리를 벗어난 藝術作品이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수많은 殉敎者들의 致命의 순간을 높고 높은 경지에서 파헤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 부단히 계속되어야 어릴때부터 한국적 가톨릭풍토에 젖을 수 있고 사회전반에 거름으로 뿌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가능성을 내다보면 우리의 敎會史硏究에 向한 관심은 너무 얕은 것이 아닌가 싶다.
南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