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단체마다 국가마다 대화를 나누자』 대화의 광장으로 모이자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그럼 대화란 무엇인가 먼저 살펴보아야 겠다. 대화란 自己內對話를 타자에게 옮김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진실성과 객관적인 진리를 공동으로 모색하여 서로 이해와 협조로 공동과제를 해결해 보자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그럼 대화란 필요에 의해 행하여지는 행위라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야말로 대화를 필요로 하는 모여서 이야기 하는 다이알그의 시대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우선 대화의 기원을 살펴보기로 하자.
대화란 인류가 지상에서 존재할 때부터 인류와 같이 흥망성쇠를 같이 나누며 존속한 것이 대화가 아닌가 한다.
아담은 神과의 대화 단절로, 외로워졌으며, 그 후손들은 대화의 상대를 찾아내어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타자는 이방인이 되었고 그러므로 분쟁의 씨를 낳게 되었을 것이다.
대화불통으로 빚어진 사건들을 우리는 구약에서 볼 수 있다.
바벨탑을 쌓고, 다시 神과 대화함으로 외로움을 풀자고, 외로워진 인간들은 신과 다시 대화의 문을 열고자하였으나 저주를 잊는 결과로 말의 혼돈에서 각기 슬픔을 안고, 이방으로 흩어져, 대화를 잊고 살았기 때문에, 많은 고생과 많은 싸움을 하여야만 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대화란 얼마나 필요한가를 말해준다. 神과 대화를 함으로, 고뇌에서 탈피하여, 진리를 찾고 구원을 받고자 영원성에 매어달렸으나, 불통으로 절망의 비애를 안고 전락한, 무수한 무신론자를 본다. 그럼 대화가 왜 우리 세대에 필요한가를 살펴보아야겠다.
과학문명으로 고도화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는 없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전 2800년 동안 901회라는 대·소전쟁이 지구상에 일어났으며 일차대전은 2800년 동안의 전쟁 횟수 보다 7배나 더되는 참사를 빚어냈고 25년 후인 2차대전은 일차대전의 4배나 더한 파괴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이 무서운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지상의 평화는 존속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겠다. 대화란 이만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교회와 사회 개인과 가정이 모든 인간 삶에서 대화가 불통한다면 얼마마한 비극이 일어날지 모를 것이다.
지금 이순간도 월남에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 싸우고 있으며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동분서주하시며 대화의 문을 여시려고 노력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토인비 교수는 『세계는 다시 로마로 모이기 시작하였다』라고 한 말은 요한 23세의 「지상의 평화」와 이번공의회로 타종교와의 벽이 허물어져 서로 대화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깃빨아래 모이기 시작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처음으로 대화의 문을 연분은 예수님이 아닌가 한다. 신과의 대화로 인간은 신의 면전에 가까워 질 수 있었고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문을 여셨다.
우리는 감사드릴 따름이다.
그 당시만 해도 율법학자들의 그릇된 신심으로 와전되어가는 복음을 주님께서는 손수 수정하시며 그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새생명을 주셨다.
이방인을<개>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사마리아 여과부도 구원받을 수 있고,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본을 보이셨으며 탕녀나 세리들의 천대를 사랑으로써 보상하여 주시며 그들에게 새희망과 새생명을 주시므로 잘못인식된 가치관을 수정하셨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본받아 세계로 떠난 것이 아닌가 한다. 대화를 한다. 이것은 사랑의 정신으로 이해와 협조로 봉사를 한다-이 말이 될 것이며 대화란 단어는 지상의 평화라는 단어와 통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그럼, 우리 주변에서 대화의 문을 여시는 분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외국인 어느 신부님은 불교와 교회간에 다리를 놓으시고 내왕하시며 서로의 이해가 부족했던 지난날이 인습을 행동으로 순화시키는 役을 하고 계신다 한다.
이분은 파띠마의 성모상을 모시고 목사들과 같이 법당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를 하셨으며 요즈음도 총무원인 「조계사」에 들르시어 기도를 부탁하고 가신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현실 참여로 예수님의 교훈을 준수하여 아직도 덜 허물어진 이방인과의 대화의 벽을 허무는 역을 하신다.
이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이며 그리스도적 사랑의 실현이라고 보아야겠다. 요사이 신학생들은 동대불교 스님들과 친선을 도모하며 사랑의 정신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새롭게 들린다. 교황께서는 월남평화를 위하여 바티깐 궁정이라도 제공하시겠다하시며 기구를 전세계신자들에게 부탁하셨다고 하는 소식-.
그리고 바오로회 신학생은 동대불교대학원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있다하니 이 모든 소식은 우리에게 『새 술은 새 푸대에 넣고 묽은 술은 낡은 푸대에 넣으시라』는 성경의 말씀으로 새로운 정신으로, 우리 평신자들도, 이웃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었으면 한다.
박스떼파노(성바오로회 재속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