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하일레·셀라시에 황제는 역시 황제 다웁게 그 표정과 태도가 근엄하기만 했다. 근엄한 자세로 행한 그의 연설도 황제 다웁게 근엄한 내용이었을 것이고, 근엄한 용어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디오피아 말을 모르는 우리에겐 「괴상한 소리」로만 들려 짐짓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발을 신에 맞추는』식의 典禮 『구경만하는』식의 典禮엔 이제 몸서리가 난지 오래지만, 아직도 그런 식의 典禮가 노익장(老益壯)을 자랑하고 있음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이 많이 모이고, 또한 많이 모이도록 노력하여 고위성직자가 집전하는 典禮에는 의례히 라띤어 성가와 라띤어 기도문이라야 구색을 갖추는 걸로 돼있다. ▲그러나 유감스런 일이지만 신자 1천명중 9백99명에겐 셀라시에 황제의 근엄한 말씀」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 라띤어 기도문이 아닐가 한다. 라띤어를 못 알아듣는 9백99명의 신자들, 「참여」를 부르짖는 공의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신자들 『나의 신앙심이 약하여 못 알아듣지 않을가?』하는 자책감으로 고민하면서 주교님의 관(冠)과 목장의 행방을 찾다보면 엄숙한 예절은 끝나버려 『구경만 했다』는 허탈감과 더불어 교회와의 어쩔수 없는 거리감으로 더욱 고민한다. ▲지난 29일 김 대주교는 착좌 축하식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이 명동대성당이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듯이, 교회도 이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역설했고, 中央日報는 社說을 통해, 천주교가 『의식면(儀式面)에 있어서 민족화·토착화(土着化)의 「템포」가 느림』을 지적했다. ▲이 땅에 뿌리를 박아, 민족화되고 토착화된 교회를 만들려면 대중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 아닌가. 서양의 풍토 위에서 자란 나무를 동양의 풍토 위에다 그대로 이식(移植)하려 한 것이 실수였다고 가슴을 치면서도 대중과의 호흡을 거부하는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알아들을 수 없는 라띤어 기도문은 신앙의 생활화에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