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축일을 맞아 참된 신앙을 견고히 하고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가르침을 보다 깊이 연구하여 가톨릭사상의 힘을 보존하고 교회와 교리에 충실하는 가운데 본래의 참신한 교리의 표현을 연구할 시기를 맞은 것이다.』 이 말씀은 1967년3 월 2일 「신앙의 해」를 선포하면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천명하신 「신앙의 해」 목적이다. 여기에 보조를 맞추어 한국주교단은 공동교서를 통하여 『다같이 신앙을 증거하며 이웃의 구원과 행복을 목표삼아 보다 충실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하겠읍니다.』라고 권고 하였다. 교황께서 의도하신 신앙의 해의 목적과 한국주교단이 제시한 이 목적달성의 수단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엿보이고 있어서 미흡한 감이 없지 않으나 6월 29일로 마감된 신앙의 해를 회고 반성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모든 교회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공고히 하고 복음을 弘布하기위함인 만큼 신앙의 해의 마지막 목표도 이런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마는 이런 원칙론의 재확인을 위하여 특별히 신앙의 해를 선포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교황의 뜻을 너무나 통속적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교황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시기를 가톨릭 정신의 본질적 요소인 성경을 존중하도록 신자들을 깨우칠 것과 성경과 신학을 세속 철학으로 해석하는 공의회 후기의 사조를 비판할 것 등을 요청하셨다.
교황께서 지적하신 공의회 후기의 「신앙의 위기」는 여러가지 담화를 통하여 잘 나타난다.
공의회 후에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소위 水平的 관련성에만 유의하고 그 垂直的 관련성을 등한시 하고 있다. 달리말해서 교회와 비가톨릭 그리스찬교회와 비신앙자, 교회와 세상, 교회와 물질계와의 관련에 대하여는 비상한 관심을 모으면서도 교회와 하느님의 진리와 사람의 관련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인권의 존중과 자유의 강조는 신앙의 주관성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그 객관성을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을 낳게 하였고 따라서 교회의 교도권 보다 각자 의 양심에 더 중점을 두게되었고 이런 사조는 윤리생활에 있어서 객관적인 도덕률 보다 주관적인 느낌에 치중하여 적당주의나 적응주의적 윤리관을 형성하고 있다. 교황께서 걱정하시는 현사조의 大宗은 대개 이러한 것들이다.
여기에 대처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신망의 해」를 특별히 선포하였고 그동안 「바티깐」 공의회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주지시키기 위하여 활발한 연구와 토론의 기회를 만들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을 전개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주교단의 공동교서는 너무나 막연한 일반론에 그쳤고 그 후에도 구체적인 지시나 조직도 없이 국부적이요 산발적인 노력 외에는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신앙의 해를 넘기고 말았다고 느껴진다.
교황께서 염려하시는 사조는 서서히 한국에도 불어와서 지난 1년 동안에 우리가 느껴온 큰 분심거리는 두 가지로 大別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교리해석과 설명에 있어서 무책임할 정도로 新奇한 주장들을 거침없이 대중에게 전파하는 경향이다. 제시된 절대적 진리를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자는 것은 이번 공의회가 지향하는 쇄신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통위에 서 있는 진보를 뜻하는 것이지 무조건 새로운 소리만을 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닌 줄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급한 사람들은 깊은 연구도 없이 서양의 어떤 학자들의 인적 견해나 가설에 불과한 주장을 마치 교회의 공인된 교리처럼 과장해서 선전할 뿐아니라 설교대에서나 교리강습회에서 공공연히 가르치고 있음을 본다. 백보를 양보해서 그런 주장들이 사려 깊은 신학자들 사이에 토론의 대상이 될만 할 지라도 아무런 신학적 연구의 훈련을 받지 아니한 대중에게 전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덕을 흔들어 줄 지언정 결코 올바른 종교교육이 될 수 없음은 이미 경험하고 있는 바다.
둘째로 현대인의 복잡한 생활환경을 고려해서 어떤 세부적인 규칙이나 규범이 완화되고 변경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더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신앙생활의 深化를 위한 것이지 안이하고 나태스러운 신앙생활을 권장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상은 어떠한가? 대중의 신앙생활에서 기도생활의 단축이나 위축이 보이고 계명의 경멸과 죄의식의 감퇴와 적당주의적인 윤리생활이 만연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면에서 복음선포를 위한 진지한 대화가 전개되고 희생과 봉사의 애덕이 활발하게 실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현상은 공의회가 또 「신앙의 해」가 의도한 신앙생활 의 쇄신도 촉진도 아니요, 오히려 신앙생활의 해이와 퇴보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적한다고 본란이 쇄신과 진보를 외면하고 復古主義를 제창하는가? 결단코 그것이 아니다. 무릇 모든 革新작업에는 전통과 혼란이 수반한다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을 개탄하는 소극적 태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습책과 해결책을 시급히 모색하고자 주장하는 바이다.
적극적인 대책의 수립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할일이지만 그중에서도 그 백성의 지도자들인 주교단에게 크나큰 임무가 부여되어 있다. 본란은 수차에 걸쳐서 한국교회의 진로를 명시하는 종합적인 설계와 지시를 탄원한바 있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청원 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가까운 시일내에 「한국공의회」를 소집해 보자는 것이다. 성직계와 평신자의 力量을 총동원하는 한국교회의 「시노두스」(종교회의)를 열어서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도까지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고 실천에 옮겨 보기로 하자는 주장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2·3년의 준비기간을 설정하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동원해서 여론의 수집과 정리와 의안의 준비 등을 서둘러야 될 것이다.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니 한국의 복음화는 그만큼 지장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