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세상이 돈을 너무나 바치고 섬겨서 물질주의로 치우쳐 흐르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에 나가는 것은 구령도 구령이려니와 저러한 돈이나 물질세계에서 일시나마 해방되려는 정신적 욕구와 그 기쁨이 은연중에 있다.
그런데 실은 그 교회에서도 막말로 돈의 강박(强迫)은 해소되지 않는다. 내가 왜 여기서 강박이라는 무례한 표현을 쓰는고 하니 이지음 각 성당에서는 연보錢 광주리를 소백이를 입은 신부님들이 들고 다니는 풍습이 생겼는데 여기서 그런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신부님에게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 신부님의 솔직한 대답이 신부들이 거둬야 훨씬 더 걷친다는 이야기이다.
연보의 기원은 옛날 애찬(愛餐)의 예식으로 예배끝에 음식을 나누어 먹는데 빈한한 이들을 위하여 부자들이 음식을 더 작만 하여가지고 와서 그것을 바친데 유래되었다 하며 이를 부제(副祭)들이 거뒀다 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성당에는 애긍통만이 놓여있었고 근년에 와서 미사중에 회장이나 교우가 걷더니 다음에는 보미사 하는 애들이 하다가 이제 신부가 직접 나서게까지 되었다. 어떤 성당에서는 마치 무당이 굿을 하다 혼백을 빙자하여 제물을 더얹으라고 조르듯 주일마다 연보전이 적게 오른다고 호령하는 성당도 있다.
물론 과거에는 우리 교회의 유지를 외국전교회재단이나 그 신자들의 애긍에 의지하다가 이제 본방(本邦) 자치 경영을 하자니 재정이 쪼달리어 저런 수단에까지 나온줄 안다. 그러나 교회유지는 차라리 교무금을 국민경제 향상과 견주어 가며 조금씩 올리는게 나을줄 믿는다. 또 한편 우리의 교회나 특히 도회지 일부 성직자들의 생활은 우리 국민의 가난과 비길 때 오히려 사치에 속한다. 李_寧이라는 촉바른 평론가가 「로마」의 대성전을 관람하고 와서는 「베드레헴」의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의 교회로서 상상할 수 없다고 비판했듯이 우리나라 교우들의 가난한 생활에서 역겨움을 안느낄 정도의 교회운영과 성직자 생활이 필요할 줄 믿는다.
들은 풍월이지만 독일에서는 나라에서 종교세를 받아서 그것을 분배 맏아 교회를 운영하고 미국은 교무금이 없이 연보만으로 이를 충당한다고 한다. 남이야 어떻든 우리도 우리에게 알맞은 교회재정자치책을 수립하되 제관(祭官)인 신부들이 성당에서 광주리를 들고다니며 애긍의 정신적 강요는 말았으면 한다. 좋은 본보기로는 왜관(倭館)성당 등서 제헌미사때 교우들 각자가 제대 앞에 나아가 헌금통에다 예물을 넣는 풍습은 각 성당이 볻받을만 하다.
具常(詩人 · 本社論說委員)